고故 호산 안동오 선생
청화靑畵와 진사辰砂의 조화를 이룬 백색 아름다움
본 연재물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전통
도자의 우수성을 계승하기 위해 일생을 보내신 1세대 작가의 삶과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녹취한 것이다. 금회에는 다양한 기법으로 백색의 아름다움을 재현한 고故 호산 안동오呼山 安東五옹의 회고를 고인의 제자인 김선인 선생님께 들었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하여 한국 전승도자의 성립과 진행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현황을 밝혀보고자 한다.
-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 최선일
일 시 : 2005년 7월
장 소 : 서울시 강동구 소재 ○○공방
대담자 : 김선인
사회자 : 정경선
참석자 : 강사 최선일 외 ‘단디도’ 회원 5명
정경선 안녕하세요. 저희 모임은 전승도예 1세대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제가 안동오 선생님의 조사를 맡게 되어 도서관에서 선생님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남아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어 직계 후손이나 제자를 찾는 가운데 김지희 선생으로부터 김선인 선생님께서 80년대 요장에서 작업을 하셨다는 말을 듣고 안동오 선생님과 작업하실 때 일화를 듣고 싶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김선인 안동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고 가업을 잇는 직계가 없어 그 분의 작업이 계승되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근대 전승도자기 가운데 백자를 만드신 대가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활동하시던 시기에는 도자기 부분의 인간문화재가 없었는데, 그 분은 경기도 인간문화재에 지정되셨습니다. 제 자신도 그 분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많이 속상했는데, 이렇게 후학들이 선학들의 자료를 모으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정경선 안동오 선생님에 대한 대략적인 이력을 말씀해 주십시오.
김선인 선생님의 고향은 굴비로 유명한 전라도 영광에서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당시 선교사가 운영하는 미션스쿨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의 와세다 대학 법학부로 진학해 다니다 3학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해방을 맞아 학업을 마치진 못하신 것으로 들었어요. 그 후 골동품 감정과 수리를 배우셨고,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밀항으로 일본을 왕래하다가 잡혀서 나중에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50년 후반 국내에서 골동품을 수리하고 감정하시면서 한국 전통 도자기에 관심을 갖게 되셨고, 결국에는 당신이 손수 만드시는 일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자기가 전무한 상태였던 당시 이승만 박사가 대방동에 도자기연구소를 만들어 유근형 선생님, 지순탁 선생님 등과 수많은 실험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통자기의 재현을 위해 여러 선생님들과 연구하면서 하나의 시편 실험을 위해 강원도까지 가실 정도로 어려운 작업을 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당시 이천에는 칠기 가마가 3~4개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선생님은 다른 분들보다 상당히 빨리 가마를 가지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일본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셨기에 한 재일교포의 후원 아래 1962년경, 경기도 광주 번촌리에 “민속도자기연구소 안동오요”를 설립하셨습니다. 대방동 시절 도자기는 재현을 위주로 실험을 하셨는데, 처음에는 청자 재현에 노력하다가 분청사기, 백자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셨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가 백자색이 너무 잘 나와 다른 분들의 청자 연구가 한창 일 때 백자에 관심을 갖고 만드셨다고 합니다.
김지희 안동오 선생님 작품 중에 청자가 있습니까?
김선인 옛날에 창고를 부수다보니 파편이 엄청 나왔어요. 청자, 분청사기 등 다양한 작품들이 있어 초창기부터 여러 작업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백자가 유색도 좋고 잘 나오니까 백자 생산에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김지희 백자를 제작하셔서 어떻게 유통하셨습니까?
김선인 65년부터 작품이 나와 처음에는 백화점 납품을 하셨고, 일본에 지인도 많으셔서 많은 양을 일본에 보내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당시 처음 납품한 곳이 신세계백화점일 것입니다. 사실 장작가마에서 백자 나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진사가 빨갛게 잘 피기가 어려웠지만, 유색과 발색이 좋아 작품을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경향은 70년대 중반까지는 재현품을 위주로 하셨고, 백자는 청화백자만 알려져 있는데, 이후에는 철화. 양각, 투각 등 다양한 종류의 백자를 만드셨습니다.
정경선 73년도에 운보 김기창 선생과 안동오 합작 도화전을 하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자료는 없는지요?
김선인 운보 김기창 화백과는 2회까지 전시회를 하셨다고 들었고, 그 후 일본에 있는 화랑을 중심으로 전시회를 하셨기 때문에 국내에 거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80년대에는 내가 거의 조각을 하여 재현보다 창작품 위주로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80년대에는 새로운 작품디자인 특히 양각, 투각 등의 작품이 많습니다.
곽선옥 안동오 선생님과 어떤 관계신지요?
김선인 난 안동오 선생님이 참 사랑하던 제자입니다. 내가 한 조각이
많이 비싸게 팔리니까 예뻐하셨는지도 모르죠(하하하).
곽선옥 당시 몇 분이 같이 활동하셨고, 가마요출은 어느 정도 하셨습니까?
김선인 당시에 한 30명 정도 작업을 했고, 가마도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초벌하고 다른 하나는 재벌하는 용도로 나누었습니다. 내가 문양 조각 부장이었지만 작품이 참 좋았어요. 나는 그 요장에서 81~91년까지 있었고, 당시 백자하는 분이 한석기씨, 유약은 광주에 노영수씨가 같이 작업을 했고, 친족으로는 형님의 손자가 화공을 담당한 안창호씨와 지금 이천에서 백자를 만드는 노영수씨입니다. 작업장이 국도를 통하여 들어가면 나무가 쭉 있어 멋있었는데,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공장이 푹 꺼져 많이 속상해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백자가 잘 나왔는데, 2~3년 전부터 경기가 안 좋아 89년부터 안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홍미자 공장은 어떻게 되었나요? 장작 가마가 2개 있다던데요?
김선인 아직도 안 팔리고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돌아가시고 원래 재일교포 땅인데 정리를 하지 않고, 그냥 방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기념관도 짓고 하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전에 한 번 찾아갔더니 현재 조카분이 살면서 관리하시더군요.
김지희 참 이천에서 활동한 고대장님 등, 초기 실제적인 작업을 하시던 분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김선인 초기 실제적인 작업을 하신 분들은 원래 칠기를 만드시던 고영국, 고영재, 이정하 등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그 분들도 나중에 요장을 차리셔서 작업을 하셨는데 결국에 성공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장이란 분들은 초기의 기능공이라 봐도 될 것입니다. 당시 대방동 연구소의 책임자이신 이화여대 황종구 선생님 아래 배운 분들이 윤석준, 김종호, 이종열, 현무남, 박순례 등으로 이 분들도 지금 65세에서 70세 정도 되셨을 것입니다. 모두 두루 돌아다니면서 작업을 배운 1세대 기능공 분들이 어찌 보면 전승도자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분들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분들의 이야기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시간되면 대방동 출신 선생님들과 대담을 하면 후배님들이 알고 싶어하는 이야기들을 다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경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안동오 선생님께서 용인대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셨다는 기사가 있던데 선생님께서는 골동품을 많이 수집하셨나요?
김선인 그건 모르겠습니다. 안동오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싶으면 지금 이천 쌀밥집 「대원」안에 가면 몇 점 남아있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에는 물건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홍미자 안동오 선생님은 타고난 실력이 있으셨나 봅니다. 60년 후반에 시작하셨지만, 짧은 시간에 백자 생산에 성공하신 것으로 보면...
김선인 선생님은 골동품 수리로 색을 볼 줄 알아 작품의 질을 빠르게 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백자 재현품과 비슷하게 나온 것도 있지만, 너무 투명한 것만 나오고 할 때 선생님은 그걸 보는 눈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작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친한 재일교포의 후원이 가장 큰 도움이 되셨을 것입니다. 아쉬운 건 직계 자손이 아니더라도 맥을 이어 나갈 제자를 양성하셨다면 좋았을 것인데...
홍미자 당시에 백자를 하시던 다른 분이 계셨습니까?
김선인 예산의 황규동 선생님이 철화 백자를 하셨고 영남지방에서 작업을 하던 분이 계신데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리고 한익환 선생님도 계셨죠. 그런데 안동오 선생님만큼 여러 가지 백자를 만드신 분을 계시지 않았습니다.
정경선 대부분의 작가들이 한 가지만 주력으로 하시는데 안동오 선생님은 다양하게 작업을 하셨네요?
김선인 그 당시는 기능공이 분업화 되다 보니 폭넓게 생산이 가능했죠. 선생님은 다완도 잘 만드셨는데, 발 물레로 끄덕 끄덕 하시면 작품이 나왔어요. 그런데 워낙 백자로 이름을 날리시다보니 다완은 가끔씩 하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최선일 도자기 굽 부분에 여러 가지 사인을 하셨던데 시기적인 차이가 나는지요?
김선인 처음 소량에는 한문으로 직접 하셨는데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전사지로 낙관을 만들어서 “안”자하고, 도자기 할 때 “자”로 쓰다가 나중에 사각으로 “안동오작”로 쓰셨습니다(“안”→“안자”→“안동오작”).
최선일 그럼 사인만 봐도 시기를 알겠네요?
김선인 청자에는 칼로 파서 사인했는데 백자는 초벌하고 코발트로 썼습니다.
유민희 청자에는 전사가 안나오잖아요?
김선인 검정색은 그래도 나오는데 유약이 두꺼우면 선명하게 나오지 않더군요.
곽선옥 우리나라에서 가스가마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요?
김선인 신상호 교수님이 송추에서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정경선 청자와 백자 중 장작과 가스가마와의 어려웠던 점과 차이는 어떤 것인가요?
김선인 백자는 청자에 비해 쉬운 편이죠. 청자는 가스가마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백자는 맥이 끊어졌다 해도 계속 명맥을 이어왔기에 가스 가마가 보급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백자도 실패가 많았는데, 특히 투각은 초벌에서도 살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안동오 선생님은 가스 가마로 제작하셔도 잘 나오니까 투각으로 대작도 만드셨죠. 작품은 쭉 장작만 하다가 79~80년경에 가스가마로 하셨는데, 기막힌 작품이 나왔어요. 우리가 볼 때 가스 가마가 안 들어왔으면 아마 장작 가마에서 완벽한 작품이 나왔을 것입니다. 가스 가마에 청자도 엄청나게 들어갔죠. 원래 매병은 어깨가 딱 벌어지고 허리는 잘룩하면서 품위가 있어야 하는데, 가마에 많이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 매병에 맞춰 주병도 제작하다보니 전통도자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많이 만드는 것에 치중한 것이 지금 우리 도자기의 선이 잘못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가스 가마도 사용하면서 장작 가마의 전통을 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끔 장작 가마로 구울 때 가보면 자연스러움은 좋은데 환원과 산화를 맞추지 못해서 진사가 녹색으로 나오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 만큼 장작 가마는 불꽃자체를 맞추기가 힘든 작업입니다.
정경선 당시 안동오 선생님이 백자를 만드는데 가장 중시하던 것은 무엇입니까?
김선인 백자에 점도 뿌리고 탁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만들었는데, 시대 상황이 변하면서 백자의 유행도 변하더군요. 예전엔 무조건 흠하나 없어야 된다는 것 때문에 좋은 작품을 다 깨버려야 했어요.
정경선 당시 전시회 도록 소장하지 않으세요?
김선인 선생님이 성공한 시기는 나이가 들었을 때라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세심하게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때 누가 밑에서 해줘야 되는데...
곽선옥 당시 원로들의 작업에 대하여 말씀해 주세요?
김선인 여러분이 계셨는데 관리능력이 탁월하고 심미안
도 있었고 형태가 나오기 전에는 기능공들은 잘 몰랐죠. 하라는 대로만 했기에 달항아리를 만들라하면 잘하는데, 디자인을 주고 해보라하면 전혀 다른 형태의 기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기능공들을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 탁월한 능력입니다. 선생님과 같은 시기에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런 걸 못한 사람은 도태된 것이죠. 대가로서 작품을 따지기 전에 기능공에게 만들게 하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은 대부분 혼자 모든 작업을 다하고들 하죠. 하지만 작업해결의 어려움이 많은 분들은 공동제작도 해보고 공동으로 작업 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혼자 겪는 어려움 보다는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학교에서 해줘야 하는데 학교에서는 신경을 못 쓰고.. 현재의 도자기 만드는 여건이 아쉽습니다.
유민희 당시부터 현재까지 작업을 하시는데, 도자기 제작에 관해서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김선인 당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5~10년 지나면 이미 백자는 발전의 한계를 가질 것입니다. 지금 80년대처럼 섬세할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고, 소박하고, 투박해도 될 정도로 도자기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자연스러움을 주기위해 일부러 점도 넣어주고, 전기가마에서 누르스름한 것(乳白色)도 나오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미적 감각을 키우는 것이라 봅니다. 끝없는 실험, 도자기는 불 땔 때마다 시편을 하나라도 넣어보아야 합니다. 아주 귀찮은 일이지만 옛날로 돌아가 보면 돈이 없을때 서울에서 홍천까지 찾아가 하나의 시편을 넣기 위해서 노력했듯이 그런 정신으로 도자기를 해야 합니다. 흙 실험도 마찬가지죠. 공장에서 산 흙이라도 계속 실험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맘만 먹으면 다 되는데... 조금 잘하는 사람은 조금 일찍 잘한다는 것뿐이지 나만의 데이터를 가져야 하고 끝없는 실험정신이 중요합니다. 당시에 나는 꿈이 높지 않아서 청자만 열심히 하여 다른 것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정경선 저희가 원로 작가에 대한 자료를 계속
모으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으면 어떤 것일까요?
김선인 초창기 대가들도 좋지만 동시대에 대방동 가마에서 작업을 하신 분들도 만나시면 진짜 옛날 얘기가 나올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능공으로 하셨지만, 1세대 분들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남기셨으면 합니다.
최선일 안동오 선생님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고, 작품도 특정 시기에 만드신 것이 몇 군데 있어. 요즘은 일본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1세대들의 작품 사진을 모으고 있습니다. 당시 안동오 선생님이 작업하신 작품 사진을 가지고 오면 누가 작업을 실제적으로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김선인 전체를 정확하게는 몰라도 제가 작업을 하던 시기 것은 알 수 있죠. 특히 조각 디자인 개발은 거의 제가 했고, 화공은 2명이 있었기에 누구 그림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선생님의 작품도 몇 개는 가짜가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배운 사람이 많았기에 선생님의 지명도를 이용한 사람도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안동오 선생님의 유약을 똑같이는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정밀하게 보면 알 수 있죠.
유민희 당시 문양과 시문방법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김선인 그렇죠. 문양이나 그림도 모두 개발을 한 것입니다. 또는 그림 그리는 것보다는 조각을 엷게 해서 코발트를 넣어 긁어 낸 것도 있습니다. 그냥 보면 그린 것 같지만 조각한 것입니다. 다른 곳의 기능공은 습관적으로 했지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새로운 것을 해보라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이 다른 요장에서 나온 것 보다 다양하게 나왔습니다. 한 3시간 이야기를 하다보니 좀 더 안동오 선생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적어놓지 못한 것이 후회되는군요. 후배들이 우리의 뿌리를 찾아다니는 것에 선배로써 미안합니다. 언제라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정경선 막상 안동오 선생님에 대한 자료를 찾으라는 최선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막막했는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조금씩 실체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바쁘신 시간을 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대담 사회·발췌자 약력
단국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도자디자인학과 재학중
호호 공방 운영(경기도 일산 소재)
백자대호
백자진사난초문필통(인터넷 사이트 재촬영)
안동오 선생의 생존 모습
백자진사매화문호, 1980년대, 이천세계도자센터 소장(『한국의 현대도자 Ⅰ』 재촬영)
각종 낙관
요장전경(경기도 광주)
대담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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