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다쿠미’(2)
글+사진 문옥배 _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다쿠미가 1914년 5월, 24살의 나이로 조선에 와서 살다가 1931년 4월 2일 오후 5시 37분 급성폐렴으로 겨우 41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 땅에서 숨을 거둠으로써 17년간의 조선생활에 못다 한 일이 많음을 야나기 선생은 이렇게 아쉬워하였다. “다쿠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많은 책을 썼을 것이다. 가까이는 「조선종이의 연구」, 「조선의 멍석」, 「은상감」 등의 제목을 단 책들을 써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조선 옛 가마터에 대한 조사는 그의 형 노리다카의 노력과 더불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을 터인데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모아진 수많은 도편들과 메모에서 그 노력의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라고 그의 죽음을 무척 애석해 하였다.
다쿠미의 조선에서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다. 이 땅을 도륙하는 높은 지위도 아니고 한국인이 벌벌 떠는 순사도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산림과 용원, 조선임업시험소의 평직원으로 17년간 일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찬사가 내려졌을까? ‘조선도자의 귀신’이란 평을 들은 형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를 통해 조선 민예에 빠져 든 그는 수입을 쪼개 도자기와 소반을 틈틈이 수집했다. 우리의 소반과 장롱을 닦고 어루만지던 그는 민예품에서 고아하고 견고하고 지극히 편리한 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다쿠미가 죽은 다음날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특히 다쿠미의 죽음을 슬퍼하는 조선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들었다고 한다. 누워있는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다쿠미의 유해에 흰 조선 옷을 입혀 관속에 넣어 운구할 때에 이문리 마을 사람 중 평소에 다쿠미를 따르던 사람들이 서른 명이나 관을 메겠다고 나섰는데 그중에서 열 사람만 메게 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쿠미는 한국인을 진심으로 정을 주며 사랑하고 그야말로 인간의 가치를 지니고 사람의 냄새를 물씬 풍긴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한다. 1927년 무렵부터 다쿠미와 알게 되어 다쿠미가 죽을 때까지 3년 넘게 가까이 지낸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아베 요시게는 ‘아사카와 다쿠미를 애도한다’는 추도문을 썼는데, 이글은 경성일보에 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아베는 다쿠미의 죽음을 ‘인류의 손실이다’라고 쓰고 이렇게 적었다.
다쿠미씨의 자유로운 품격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다쿠미는 생전에 농담처럼 “나는 신에게 ‘돈을 모으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농담 속에 다쿠미씨의 진면목이 있다. 다쿠미 씨의 생애가 이 말을 뒷받침해 주었음을 생각하면, 그것이 결코 단순한 허영심이나 겉치레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로 다쿠미씨는 아마 거기서 일종의 종교적인 위안을 얻으며 현실에 대처하였기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중략)
다쿠미의 동료인 조선사람 김이만(한국 임업시험장 고문-1985년 별세)씨도 1979년에 다쿠미 씨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다.
아사카와씨는 한국말이 아주 유창했으며 항상 한국말로 이야기 했다. 삼촌 사촌 같은 한국의 친척관계 촌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인 동료에 대해 차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일본인 동료로부터 ‘당신은 한국인이냐’는 욕도 먹고 구박도 받을 만큼 한국인을 사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고 저녁때는 바지저고리 차림에 나막신을 신고 집에 돌아갔다. 긴 담뱃대를 물고 중국 모자를 쓰고 새끼로 짠 꼴망태를 등에 메고 시장에 가서 한국의 골동품이며 도자기들을 사 모았다. 그리고 괴상한 모습 때문에 일본인 경관의 조사를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아사카와씨는 임업시험장 안에 살면서 평소 한국인에게 친절하고 한국인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정월이나 연말에는 많은 한국인 동료들이 그의 집으로 놀러갔다. 자기는 굶는 한이 있어도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었고, 한국인 학생 몇 사람에게는 장학금을 주고 있었다. 대상은 주로 국민학교 학생들이었고 중학생도 두엇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대게 임업시험장 직원의 자녀들이었다. 아사카와 씨는 평소에 자기는 굶더라도 자기보다 가난한 한국인 동료나 노동자들을 도왔기 때문에, 별세했을 때 장례비조차 없었다. 또 ‘나는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오. 한국식으로 장사를 지내 주시오’라고 유언했다.(중략)
다쿠미의 장례를 끝내고 조선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가던 야나기 선생은 배안에서 <공예>에 실은 원고에 ‘다쿠미군은 내가 가장 애모하는 벗 중에 하나다. 사귄지 벌써 15년이나 된다. 평소 그렇게 건강하던 그 몸에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두고두고 애석하게 생각한다.’라고 쓰고 일본에 도착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아사카와가 죽었다.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다. 그렇게도 속속들이 조선을 알고 있었던 사람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그는 정말로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사람을 사랑했다. 그리고 조선 사람들에게서 정말 사랑을 받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조선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정을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다. 자진해서 나선 조선인들이 상여를 메고 조선 공동묘지에 그를 묻어 주었다. 나와는 오래 사귀어 온 벗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조선에 대해 내가 한 일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민족미술관은 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곳에 소장된 많은 물건은 그가 수집한 것들 이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훌륭한 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사람만큼 조선의 공예 전반에 걸쳐 실제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이 서로 계획한 일도 많았다. 그 반밖에 이루지 못하고 죽음으로 헤어지다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그가 없는 조선은 가도 찾아갈 곳이 없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자주 드나든 까닭도 절반은 그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를 특히 인간으로서 존경했다. 나는 그 사람만큼 도덕적으로 성실한 이를 달리 알지 못한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눈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초월해서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 성실한 영혼이었다. 그 사람만큼 사심이 없는 사람은 드물다. 그 사람만큼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의 도움으로 공부한 조선인들이 적지 않다. 나는 그가 하는 일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던가. 나는 그가 내 벗이었음을 명예롭게 생각한다.(중략)
동경대학교의 하루키 교수는 ‘땅에 몸을 붙이고 어두운 밤에도 제 몸에서 빛을 내어 주위를 밝게 하는 그런 사람’이라 평하였다. 그리고 조선 근대사를 연구한 쓰다주쿠 대학의 다카사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다쿠미를 회고하였다.
미처 우리가 우리 전통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남 먼저 알고, 느끼고, 또 몸과 마음으로 그 미와 하나가 된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민예에서 받은 미적 충격을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조선의 소반」이란 연구 자료로 펴내어 도자 연구의 길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것은 전국의 흩어진 가마터를 두 발로 뒤지고 다님으로 얻은 결과로, 「조선도자명고」에서는 한국 사람도 모르는 그릇 본래의 이름과 쓰임새를 자세히 정리한 책이다. 연구 논문이 나오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다쿠미의 안목을 극찬했다.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이 활짝 뜨게 되었다.’ 그는 영원히 한국인이고 싶어 죽어서도 한복을 벗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문동에 있었던 묘를 1942년 망우리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팠을 때다. 그는 단정한 조선옷을 입고 동그란 로이드 안경을 낀 묻힐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절, 조선 사람까지도 일본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 사람을 핍박하고 대지주를 농락하면서 농민을 수탈하여 부를 쌓고, 조선인을 인간이하의 쓰레기처럼 생각하고 멸시하며 학대하던 악명 높은 일본인들 틈에서 다쿠미는 할아버지 오비 시토모나 형으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으로 본연의 임무인 조선의 녹화에 종사하면서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고, 조선의 민예품을 연구하고, 직장이나 동네의 조선 사람들과 사귀면서 인간애를 보여주고, 이 땅의 문화와 자연을 사랑하다 41살의 젊은 나이에 이 땅에서 죽고 이 땅에 묻혀 한줌의 한국 흙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아름다운 그의 생애를 기리며 광복 6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그의 묘가 한국인의 이름으로 지켜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마침 다쿠미의 성실한 인간성에 매혹되어 소중한 증언과 자료들을 정리하여 썼다는 일본인 ‘다카사키 소지’가 지은 저서(이대원 옮김)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책을 읽고 필자도 이에 감동하여 여러 동료와 공예인들에게 전하고자 이렇게 몇 자 간추려 보게 된 것도 나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다.
현재 다쿠미의 묘소는 1945년 4월 그의 유언대로 한줌 한국의 흙이 되고자 그가 살던 이문리 마을 뒤에 묻혔다가 죽은 지 11년이 지난 1942년 묘지근처에 도로가 새로 뚫리게 되어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하여 묻혔다. 해방 후 훼손된 그의 묘를 1964년 6월 20일 옛 동료들인 ‘한국임업시험장’ 직원들이 다시 복원하여 수복제를 올리고 그해 8월 25일 한글 묘비를 세웠다. 그리고 2년 뒤 1966년 6월에는 그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생애를 기리고 추모하는 기념활동이
여기저기서 추진되고 있다. 2001년 3월 31일 다쿠미의 70주기 추도식이 한국전통문화교류협회에 의하여 개최되었는데 이때에 주한일본 대사관의 데라다 데루스케 대사의 추도사가 낭독되었으며 여기에는 다쿠미의 고향인 다카네정의 정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하였다. 이후 경기도 포천시에서는 다카네정과 자매결연을 맺고 다쿠미를 기념하는 공원을 국립수목원 인근에 만들고자 추진 중에 있다. 그리고 필자가 참고한 여러 가지 저서들 외에도 다쿠미에 대한 유명한 저서 하나가 있는데, 1994년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가 그 시대에 이런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일 양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다쿠미의 일생을 그린 전기소설 [백자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최근 재일동포 이춘호(54·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시 거주)씨가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다쿠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제작하려하고 있다. 이춘호씨는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처음 알린 선구자였음에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선인과 조선 문화를 사랑하고 자신의 뼈까지 한국 땅에 묻은 또 한명의 조선인을 기념하고 싶었다.”고 영화제작을 결정한 배경을 말한다. 이 영화는 금년 중에 완성할 예정에 있다. 그리고 또 최근의 행사로는 2005년 6월 11~12일 장충동 국립극장의 해오름극장에서는 한국의 사물놀이를 대표하는 김덕수씨와 일본 최고의 북연주자인 하야시 에데스林英哲씨가 다쿠미를 추도하는 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그들은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반도와 일본사이에 흐르는 수로에 아무도 모르게 피어난 연꽃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수로의 연꽃’이라는 제목의 북연주로 다쿠미의 영혼을 깨워 젊은 그의 주검을 달래주었다.
(연재 끝)
다쿠미의 장례식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다쿠미’ 책표지
서울 망우리의 다쿠미 묘소
필자약력
1972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4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취임
1998 전국공예대전 본선 심사위원
1998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본선 심사위원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비상임이사
2002 우수산업디자인(GD마크) 상품선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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