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도예 활성화를 위한 제언
작품에 이슈를 담는다는 것
글/사진 서병주 명지전문대학 공예디자인과 교수
작품에 이슈(issue)를 담는다는 것이 새로운 사실로 들리지는 않는다.
경력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표현중심의 도예작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슈를 설정하고 작업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예작업에서 이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늘 보고, 듣고, 논하고, 깨달은 것들을 일일이 나열한다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숲을 이룰 만큼 벅찬 일이므로 이렇게 한정된 지면을 통해 <현대 도예사>를 복습하는 일은 잠시 접어놓기로 하고 그 대신 이슈에 접근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이슈의 함정
누구나 자유롭게 이슈의 방대한 숲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나무를 가져다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나무를 잘 못 키우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함정이라 표현하고 싶다. 표현중심의 도예작업에 있어 우리의 머리가 착안하는 상상력과 가슴이 이끄는 열정은 때때로 자신의 두 손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은 뛰어난데 그 도면을 실행할 기술적, 경험적 기량이 부족한데서 오는 좌절은 이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빠져 보았음직한 함정 아닌가. 그 반대의 양상도 있다. 두 손은 뛰어난 기량으로 무장되어 있는데 막상 그 기량을 제대로 이끌어 갈 상상력 혹은 이슈의 빈곤함으로 인해 좀처럼 도약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맴도는 경우가 그것이다. 표현중심의 도자예술이라 해서 재료 및 기술과 같은 하드웨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소프트웨어이자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인 이슈가 도자재료 및 기술과 같은 하드웨어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할 때 그 상상력은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좌절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런 결과물은 ‘습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도자재료 및 기법, 경험적 기술이 한낱 상상의 날개를 꺾거나 발목을 잡아 좌절에 이르게 함으로써 의욕을 떨어뜨리는 필요악(必要惡)정도로 간주된다면 이미 이슈의 함정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도예가가 담으려고 하는 이슈가 너무 커서 현재의 재료나 기술수준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거나 아니면 반대로 이슈는 적당한데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재료와 기술이 너무 미약한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의 간극(間隙)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때로는 이슈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도예작업에서의 좌절감은 많은 경우 이 간극(間隙)에서 비롯되며 실망의 크기도 그것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사견(私見)이지만 이슈의 자유를 누리기 전에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슈와 표현매체의 적합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런 이슈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는 흙인가? 금속인가? 아니면 나무인가?’ ‘만일 흙이라면 어떤 색상과 질감의 흙인가? 성형기법은 핸드빌딩 기법이 최선인가 아니면 30개 이상 되는 석고틀을 만들어야만 가능한 일인가? 소성횟수가 4회 이상 되어야만 한다면?
이런 솔직한 질문 앞에서 단지 공정이 복잡하다거나 많은 시간과 노동이 뒤따른다는 이유만으로 회피하는 경우 애초의 이슈는 그 명분을 훼손당하게 된다. 특정한 이슈의 경우에는 차라리 혼합매체를 통해 설치미술(installation)형식으로 전개되거나 또는 소설이나 시(詩)같은 문학을 통한 표현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실험적인 단편영화가 최선의 의사전달 방식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정답은 없으며 때로는 차선책으로서의 도예장르가 훌륭한 목표에 달한 경우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개되지 않은 더 많은 도예가 들의 욕구불만 혹은 좌절도 존재하고 있다. 결국 이슈의 부재(不在)가 문제되기 보다는 오히려 이슈와 그것의 전달을 실현시키는 도예재료 및 기법과의 불균형이 표현중심의 도자에서 흔히 겪는 어려움의 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번 글에서 조심스럽게 조명하고자 하는 <이슈>이다.
도예장르의 태생적 속성에는 참으로 넘어야 할 벽이 많다. 그래서 도예가는 예술가처럼 상상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과학적 접근방식을 견지해야 하며 때로는 숙련공의 얼굴로 변신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훌륭한 작품들은 그 이슈 자체만으로 돋보이는 경우보다는 이슈와 그것을 표현하는 재료 및 기법 사이에 이루어진 진지한 투쟁, 도전, 타협의 결과인 것이 많다.
적어도 도예가 자신이 상상한 것들을 기술적 혹은 재료적 한계 때문에 폐기해 버리는 커다란 손실을 줄여 나가기 위해서도 이런 방식의 성찰은 필요하다. 좋든 싫든 도예에 있어서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는 서로의 다리한쪽이 한데 묶여 있는 절반의 자유상태에서 목표지점까지 어깨동무하고 뛰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 것처럼 보인다. 호흡이 맞지 않을 때는 서로를 탓하며 허우적거리기 일쑤이지만 일단 박자만 맞추면 다른 장르에서 맛 볼 수 없는 보상이 따른다.
2. 이슈를 고찰하는 프리즘 : 재료-기술-상상력
이슈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갖는 것에서부터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방대하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므로 이 코너에서는 이슈를 해체하여 그 면면을 살펴보는 일종의 프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순수미술은 이미 미술비평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확보하고 있다. 나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표현중심의 현대도예 장르를 순수미술의 비평체계로 투영해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도예에 있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하드웨어적인 부분에 대해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재료-기술-상상력이라고 하는 세 가지 요소는 표현중심의 도예를 구성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프리즘으로 하여 도예작품을 바라보면 흥미로운 분석결과를 얻을 수 있다. 재료에 정통하여 그 물리적, 화학적, 미학적인 특성을 파헤치고 그것을 더욱 드러내는 작품<사진 1>.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놀라운 기술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사진 2>. 보는 이의 감성 또는 이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상상력의 산물<사진 3>. 이와 같은 기본적인 분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재료와 기술의 우위를 동시에 보여주는 경우<사진 4>와 뛰어난 기술과 상상력을 동시에 구현한 작품<사진 5>도 가능하며 재료-기술-상상력의 모든 면에서 깊은 경지를 구축한 경우<사진 6>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프리즘은 도예가로 하여금 완성된 결과물을 바라보는 분석적인 시각은 물론 자신이 담고자 하는 이슈를 설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프리즘은 도예가로 하여금 자신이 담고자 하는 이슈와 그것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도예가의 현실적인 조건을 따져 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재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한 것인지, 일정수준의 기술적 능력이 따라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빈곤한 상상력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여러모로 성찰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경험은 매우 쓰라린 것이지만 훌륭한 도예가란 기약도 없이 하늘에서 던져주는 영감(靈感)을 운 좋게 낚아 챈 소수의 행운아들이 결코 아니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재료 및 기술과 같은 하드웨어와의 싸움에 투자한 결과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이러한 성찰의 마지막 지점에는 대개 희망적인 암시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앞서 말한 대로 이슈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표현중심의 도예가 발전한다는 것은 이슈의 다양함 못지않게 그것을 실현하는 재료적, 기술적 해법(解法)이 함께 향상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양질(良質)의 작품 창출에 이바지하는 비평 활동과 작품유통은 물론 향상된 재료와 도구의 공급이라고 하는 산적(散積)한 많은 외적인 문제를 논외(論外)로 하고도 그렇다.
필자약력
서울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
1997 제6회 스위스 카루즈 국제도예 비엔날레 대상
제50회 이태리 파엔자 국제도예 공모전 금상
제5회 스위스 니용 국제 현대자기(磁器)트리엔날레 작가선정
1999-2000 미국 필라델피아 에블린 샤피로 재단으로부터 제9회
예술기금 후원 대상자로 선정
현, 명지전문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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