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첨단설비와 기술력, 한국의 젊은 인재와 전력이 만나
희토류 대란을 극복하고, 드넓은 FTA 영토를 함께 개척한다면...
가깝고도 멀기만 했던 일본의 아픔. 그러나 그 아픔이 비단 일본의 것만은 아니었다. 아물지 못한 상처로 인해 혹여나 이웃의 고통을 냉소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건만, 원 아시아라는 시대적인 요구는 이미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낡은 딱정이를 떼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 함께 아프다는 것에 그들보다 오히려 우리가 더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함께 아파할 수 있다면, 함께 기뻐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동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기만 했던 일본과 함께 진정한 동반자 관계를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500여 년간 지속된 상처의 근원이자 여전히 썩은 고름을 뿜어내고 있는 세라믹에서부터 말이다.
일본 대지진에 한국 부품소재산업 직격탄
지난달 11일 발생한 진도 9.0의 강진과 20m높이의 쓰나미. 그리고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유출. 지구촌은 지금 안타까운 인명피해를 애도하는 한편 3위의 경제대국이자 첨단소재와 핵심부품의 공급기지인 일본의 피해상황과 이로 인한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일본으로부터 부품소재에서만 243억불(전체 350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중인 대한민국의 제조업, 특히 일본에서 핵심부품소재를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IT산업은 직격탄을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일본과 경쟁중인 국내업체의 반사이익도 기대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수요가 확대되고 있는 낸드플래시는 물론 공급과잉에 시달리던 D램까지 가격이 급등하며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의 수익률은 큰 폭으로 확대될 전망. 더욱이 이번 지진으로 반도체원재료인 실리콘웨이퍼 생산업체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이중고를 겪고 있는 일본과 대만의 경쟁업체들과 달리 웨이퍼 자급률이 높은 대한민국의 시장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일본의 세라믹부품소재 없이는 반도체라인 올 스톱
하지만 딱 여기까지. 정전척, 히터 등 반도체 제조 장비내부의 소모성 부품은 대부분 일본의 세라믹기업들이 독과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온, 고압의 조건을 정밀하게 관리해야만 하는 세라믹공정의 특성상, 설령 대지진과 쓰나미의 직격탄을 피했다 한들 전력공급 불안이 장기화될 경우 이들 기업의 생산차질은 불가피한 상황. 즉,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아무리 생산설비를 확대하고 원재료를 확보해도 일본산 세라믹부품의 원활한 공급이 없으면 생산확대는 커녕 현상유지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품목별로 일본의 한 두개 업체만이 전 세계 시장을 독과점하고, 또 핵심소재는 전략물자로 국외반출도 안되는 상황에서 마땅한 대안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바로 IT강국 대한민국 반도체산업의 현주소인 것이다.
물론 일부 국산화에 성공한 품목들은 점유율이 확대되고 점차 국산화되는 품목들도 많아지겠지만, 세라믹소재부품의 대일종속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던 만큼 이제는 보다 근본적이고 범국가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전력다소비 업종의 해외이전으로 원전증설 자제할 것
한편 이번 대지진을 통해 일본 세라믹기업의 한국유치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바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전력난 때문이다. 금속, 고분자보다 고온의 작업환경과 고가의 생산설비를 요하는 세라믹소재의 특성상, 세계시장을 독과점하고 있는 일본의 세라믹기업들도 전력난이 장기화될수록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에 적극적일 수 있다는 것. 3월25일 현재, 대지진과 쓰나미의 직격탄은 피했으나 정전으로 공장가동을 중단했던 오카모토유리, 도소쿼츠 등 세라믹기업들이 계획정전 속에서도 자가발전기를 통해 일부라인의 생산을 재개하고 있다는 소식이 현지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언제까지 자가발전기에 의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원자력발전을 확대하는 것이 전력난을 해소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과 원전폭발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모두 경험한 일본정서는 결국 전력다소비 업종의 해외이전을 통해 원자력발전소 증설을 최대한 자제하려 하지 않을까?
전력난에 허덕이는 첨단세라믹산업을 적극 유치해야...
그리고 이미 한계기업들의 해외이전이 마무리 된 일본에서 한국이 주목해야할 전력다소비 업종은 바로 단결정을 필두로 한 첨단세라믹 기업들. 이들은 전력난이 해소될 때까지 생산규모를 축소 또는 동결하거나 아니면 하루빨리 안정적인 전력을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는 대체 부지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동안 대일무역적조를 개선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일본의 부품소재기업을 유치하려 했던 한국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구애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들은 신중한 자세로 임해왔다. 이미 중국 진출 후 유턴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던 상황에서 중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반일 감정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 하지만 이번 대지진을 통해 우리가 일본이라는 이웃에 대해 지금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감을 발견했듯, 그들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물론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하겠지만 분명 그들 또한 파트너로서의 진정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력과 FTA영토, 일본에겐 포기할 수 없는 유혹
그렇다면 일본 현지의 분위기는 어떠할까? 아쉽게도 일간공업 등 현지 언론에서는 한국보다는 대만, 중국이 생산거점으로 먼저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 인재와 안정적인 전력, 발효가 임박한 미국과 EU와의 드넓은 FTA영토, 그리고 삼성, LG, 하이닉스와 같은 탄탄한 수요산업 등은 일본으로서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아닐까?
이에 대해 (재)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의 일본비즈니스센터 관계자는 “현재로써는 현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상황으로 아직까지는 관망하는 단계”라며 “6월경 일본에서 한일기술협력페어가 개최될 예정으로 이 시기가 되면 피해복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유치 대상기업의 윤곽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략물자 반출제한을 완화할 묘수를 마련해야...
하지만 일본의 첨단세라믹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풀어야할 과제도 있다. 현재로써는 일본의 첨단세라믹기업들이 보유한 고가의 설비를 국외로 이전하고 싶어도 전략물자로 지정 해외반출이 어려운 상황. 미사일 등 각종 군사무기의 핵심부품으로 사용되는 세라믹을 바로 일본에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초고순도 SiC분말 등 일본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세라믹소재 역시 비슷한 이유로 국외반출이 금지, 제한되고 있다. 때문에 한일 양국간 또는 부품소재 전용공단내에서 만이라도 이에 대한 적용이 완화될 때 한국으로 이전한 일본기업이 자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원활한 기업활동이 가능한 실정이다.
일본의 기술이 중국으로 가면, 한국 세라믹산업은 초토화
원천기술을 보유한 미국, 유럽의 세라믹산업도 감히 넘볼 수 없었던 세라믹 절대강국 일본의 자존심이 고령화로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는 동안, 중국은 희토류자원과 거대시장을 무기로 머지않아 송나라 시대 꽃피웠던 세라믹강국의 위상을 되찾을 기세. 그리고 대지진과 함께 찾아온 사상최악의 전력난. 혹여나 일본의 선택이 중국이 될 경우 대한민국 세라믹산업의 명운은 자명하지 않을까? 이미 산화물은 중국에 턱밑까지 추격당한 한국의 세라믹산업이 비산화물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이때. 일본의 기술로 무장한 중국의 첫 번째 출병지는 바로 대한민국, 그리고 이내 말 머리는 다시 일본을 향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무서운 식탐이 한국의 영세한 중소기업군에 만족할리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기술과 설비가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면, 일본의 독과점이 일정부분 와해된다 하더라도 중국과의 직접적인 마찰은 피할 수 있을 전망. 중국과의 무역수지는 균형을 이루면서도 한국이 중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다시 회수해가는 현재의 무역수지 구조가 일본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안광석 기자 dora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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