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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다쿠미>의 묘소를 참배하고서(1)
  • 편집부
  • 등록 2006-03-28 17:4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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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다쿠미>의 묘소를 참배하고서(1)

글+사진 문옥배 _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지난해 본지 10월호와 11월호에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 1891.1-1931.4에 대한 글을 연재한 후 시간이 나면 망우리공원의 다쿠미 묘소에 꼭 한번 가서 참배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오다 지난 늦가을 그의 묘소를 찾았다. 가을 끝자락에서 초겨울의 맛을 느끼는 그런 날씨였다. 이날 오전, 월간도예 편집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달에는 다쿠미의 친형인 조선 도자기의 귀신이라 불리는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 1884-1964에 대해서 준비해 두었던 글을 내기로 하고 오전에 원고를 잡지사로 보냈다. 원고를 넘기고 나서야 문득 다쿠미의 묘소를 참배해야지 하고 몇 번이나 벼려왔던 일이 생각나 내친김에 오늘 한번 가볼까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점심을 먹고 1시경에 화곡동 사무실에서 차를 몰아 가양대교를 건너 구리방향 강변북로를 타고 성산대교를 지나기 전이었다. 왼쪽 한 차선 건너 앞서가던 중형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앞차의 오른쪽 꽁무니를 들이받고서는 바로 내 앞에 가고 있는 승용차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차량 두 대가 뒤엉켜 거꾸로 동그라져서 길가에 멈춰 섰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가까스로 멈춰 섰다. 바로 코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돌발 사고였다. 마침 바로 뒤따르는 레커차가 있어서 바로 수습이 되고 다행히 사망자는 없는 듯 보였다. 피투성이의 운전자를 보니 너무 끔찍했다. 아마도 트럭 운전사가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콩닥거리는 놀란 가슴을 안고 다시금 차를 몰아 계속 길을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만약 내 앞차가 조금만 더 빨리 가서 내 차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이래서 인간의 운명은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구나.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41살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죽어간 다쿠미의 넋이 그의 유덕을 기리며 묘소에 참배하러 가는 나를 어여삐 여겨 하나님께 매달려 돌보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아무튼 무사함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강변북로에서 동부간선도로로 방향을 바꾸어 상계동 쪽으로 달렸다. 중량교에서 구리방향으로 빠져나가 상봉역과 망우역을 지나서 망우리 고갯길을 오르다 보면 고개 꼭대기에 다다르기 전 우측에 「사색의 길 망우리 공원」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여기서 우로 굽은 비탈길을 급회전하여 약 4~500미터쯤 오르면 왼편에 주차장과 「망우리 묘지관리소」가 나타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위치를 물으려고 관리소에 들렀다.

다쿠미의 묘는 3의 6구역 묘지번호 203363번이다. 묘지의 위치를 물으니 관리소장이 컴퓨터 관리대장을 찾아보고 나서는 “일본사람 아사카와 다쿠미 씨 묘군요”라고 하더니 나더러 어떤 관계냐고 물었다. 그래서 그냥 평소 존경하는 분이라 한번 찾아보고 싶어 왔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상당히 걸어 올라가야 되니 차를 가지고 올라가라고 특별히 찻길을 열어주면서 위치를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관리소 100미터쯤 위에서 찻길이 좌우로 갈라지는데  우측 길로 산허리를 한 바퀴 돌아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다. 한 바퀴의 거리가 4.7킬로였다. 묘지공원은 산책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을 나온 인근 주민들이 꽤 많았다. 표지판에 쓰인 대로 먼저 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사색을 하기에 여간 좋은 길이었다.   

우측으로 비탈길을 따라 산 옆구리를 왼편에 끼고 몇 구비를 돌아 2킬로 정도를 올라가면 다시금 삼거리 길을 만난다. 거기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굽은 언덕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 오르면 왼쪽에 사각지붕의 쉼터가 있는 정상에 다다른다. 고갯마루를 넘어서 서서히 내리막 구비 길로 약 5~6백 미터 정도 가다 보면 오른편에 팔각정이 하나가 나온다. 거기에서 150미터 정도를 더 내려가면 왼편이 「동락천 약수터」다. 약수터에 서서 찻길을 따라 10여미터 거리의 왼편 산등성이를 쳐다보면 찻길에서 5~6미터 정도 올려다 보이는 곳에 항아리 모형의 묘석이 보인다. 거기가 바로 다쿠미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대리석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사진에서 본 대로 묘비와 석물들로 둘러싸인 다쿠미의 묘가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묘소 앞 상석 위에는 오래된 마른 꽃다발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얀 리본에 빛이 바랜 글씨로 「산이현립농림고등학교山梨縣立農林高等學校」 라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다쿠미의 고향 야마나시현에 있는 학교에서 다녀간 모양이다. 나는 묘지의 위치나 알아두고 다음에 다시 찾을 요량으로, 그리고 또 사실 묘소를 확실히 찾을 수 있을지 몰라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오다보니 화환도 하나 준비하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중히 머리 숙여 잠시 묵념을 드렸다.
 
‘우리의 공예를 그토록 사랑하시다 무엇이 그리 급하여 그렇게 일찍 가시었습니까. 지금도 당신은 우리 공예 사랑의 끈을 아직도 놓지 않으시고 계시는 듯합니다. 이 땅에서 한국의 공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제야 당신의 유덕을 깨닫고 이렇게 늦게 찾아뵙게 됨을 용서하옵소서. 당신의 그 불타는 열정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편하게 공예의 길을 가는지도 모릅니다. 조선공예에 대한 당신의 깊은 애정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당신의 크나큰 공덕에 삼가 감사와 존경을 드립니다. 유난히도 조선의 백자를 사랑하셨던 당신, 당신은 죽어서도 한국의 흙이 되어 조선의 백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으셨던 거지요. 당신의 염원으로 조선의 백자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맥을 이어 가면서 영원히 인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염려의 끈을 놓으시고 부디 편히 쉬십시오.’
     
이렇게 묵념을 드리고 나서 묘소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와서 벌초를 했는지 묘소가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역시 다쿠미의 묘는 무언가 달라 보였다. 묘의 봉은 마치 밀짚모자를 눌러 놓은 듯하였고, 또한 도자기를 사랑한 그의 열정을 위해 도자기 항아리 모형의 큰 조형 석물이 상징적으로 그 곁에 서 있었다. 그런데 1996년에 9월에 발행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다카사키 쇼지 지음 / 이대원 옮김 / 도서출판 나름)이란 책에 실린 사진과는 석물들의 위치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사진에는 없던 상석이 묘소 한가운데 놓여 있는 걸 보니 누군가가 그 후에 더 치장을 한 모양이었다.   

상석의 앞 중앙에는 향로석이 있고, 상석의 양옆에는 조그마한 도자기 모양의 화병석이 놓여 있었다. 상석의 크기는 가로가 113센티이고 세로가 76센티인데 20센티 높이의 상석 앞면에는 큰 글씨로 아래와 같이 새겨져 있었다.
 삼가 유덕遺德을 기리며 명복冥福을빕니다
 
상석 오른쪽 면에는 그의 출생 날자와 출생지, 그리고 사망 일자와 사망 장소가 새겨져 있었다.
 1891년 1월 15일 탄생
 일본국산이현북거마군고근정오정전日本國山梨縣北巨摩郡高根町五町田
 1931년 4월 2일 별세
 한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또 상석의 왼쪽 면에는 상석을 세운 날자와 세운 이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평성平成 9년 4월 2일 봉헌奉獻
 천천교선생淺川巧先生의 탄생지일본국고근정誕生地日本國高根町
 1997년 4월 2일 건립建立
 한국 산림청임업연구원山林廳林業硏究員 홍림회洪林會

1997년 4월 2일 한국의 산림청 임업연구원(현재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변경)의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일본의 다카네정町과 공동으로 상석을 만들고 묘지를 정비하면서 그때 일부 석물들의 위치도 바뀐 것이 분명하였다.  
상석 왼쪽 편에는 가로 56센티 세로 37센티 크기의 조그마한 공덕비(기념비)가 2중 받침대 위에 놓여 검은 색 대리석 바탕에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 아래와 같이 그 유명한 비문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이 비문의 좌측 옆면에는 글씨가 없고 우측 옆면에는 이를 세운 날짜와 세운이가 누구인지 새겨져 있었다.
 ‘1984년 8월 23일 임업시험장 직원일동’

또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다쿠미 씨의 약력과 업적이 쓰여져 있었다.
     천淺    천川    교巧
       1891. 1.15     일본국日本國 산이현山梨縣에서 출생出生
       1914 - 1922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림과山林課 근무勤務
       1922 - 1931  임업시험장林業試驗場 근무勤務
       1931. 4. 2     식목일植木日 기념행사記念行事 준비중準備中 순직殉職

       주요업적主要業績
       잣나무 종자種子의 노천매장露天埋藏 발아촉진법發芽促進法
       개발開發 (1924), 조선朝鮮의 선膳 (1929), 
       조선朝鮮의 도자명고陶磁名考(1931) 저술著述 

이 공덕비는 1984년 8월 23일 한국임업시험장 직원 일동의 이름으로 세워졌던 것을 임업시험장의 후신인 임업연구원 원장 조재명 씨가 다쿠미의 약력이 새겨 있지 않고 비문의 형태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퇴임하기 전에 다시 모금운동을 하여 1994년 5월 20일 새로 바꾸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초의 비문 앞면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의 산과 민예에 바친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또 상석의 오른쪽 편에는 65센티미터 높이의 조그마한 묘비가 서 있는데, 이것은 여기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임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세로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천천교공덕지묘淺川巧功德之墓’

그 묘비 뒷면에도 이렇게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서기일구삼일년사월이일西紀一九三一年四月二日 졸卒
       서기西紀 일구육육년육월一九六六年六月 일日
       임업시험장직원일동林業試驗場職員一同 건립建立’ 

묘비 바로 옆에는 1미터 30센티 높이에 8모로 각이 진 뚜껑 항아리 모양의 도자기를 상징하는 큰 조형 석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것은 다쿠미가 서울 시내 골동품가게에서 구입한 조선의 ‘추초무늬 청화백자 모따기 항아리’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 이 항아리 모형의 석물에서 8모의 각을 빼고 보면 마치 국보 170호 백자청화매조문항아리(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처럼 보였다.
이 조형물의 밑받침을 제외한 항아리 모형의 실제 크기는 높이가 약 95센티에 항아리 둘레 큰 지름이 2미터 40센티 정도나 된다. 이 조형물은 다쿠미의 친형인 노리다카가 조선의 도자기를 너무나 사랑했던 동생을 기리기 위해 디자인하여 다쿠미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곧바로 세웠다고 한다. 이것은 정말 다쿠미를 상징하는 조형물로써 너무나 잘 어울린 것 같았다. 멀리서 보아도 큰 항아리형의 도자기가 하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여서 찾기도 쉽고 보기에도 좋았다.

항아리 받침돌을 자세히 둘러보니 뒤쪽 한군데의 글씨가 오랜 세월의 풍상에 깎겨서 흐릿하게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소화昭和 육년六年 사월四月 이일二日’

소화 6년은 서기 1931년이다. 그리고 4월 2일, 이 날은 다쿠미가 사망한 날짜이다. 그러므로 이 조형물을 건립한 날은 아닌 것 같고, 아마도 그가 죽은 날을 잊지 않기 위해 그의 형 노리다카가 새겨 둔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필자약력
1972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과 졸업
1994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 취임
1998 전국공예대전 본선 심사위원
1998 전국관광기념품공모전 본선 심사위원
1999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위원
2000 한국공예문화진흥원 비상임이사
2002 우수산업디자인(GD마크) 상품선정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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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erazin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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