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중3때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노라는 꿈을 위해 액자에 끼운 피카소 사진을 안고 무작정 상경하고 난 뒤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예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지 20여년이 지났다.
돌이켜 보면 그 긴 세월 동안 위대한 예술은 커녕 썩지도 않는 쓰레기만 만들어 낸 부끄러움 밖에 남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별도로 초창기의 나의 작업 또는 작업관에 대한 글을 별도로 www.claypark.net의 칼럼에 실어 놓았다. 참고하시기 바라며… 어쨌든 나의 작업은 그릇을 만들기 보다는 세상에 대한 반항 내지는 비아냥으로 점철되었다.
80년의 봄은 군사정권에 항거하던 지식인과 학생들의 열망으로 들떠 있던 시기였다. 수업은 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류에 대해 고민하던 그런 날들이었다. 무엇을 해도 어수선했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으면 비겁함이 앞섰다. 또한 당시의 우리 도예는 그릇이냐 아니냐, 실용이냐 비실용이냐 등의 논쟁아닌 논쟁으로 분분하였다.
사회적 혼란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으로 범벅이 되었던 3학년 무렵 후기도예가회 전시회 심부름을 하면서 뒷풀이자리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들도 나의 작업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다. 후기도예가회는 당시로는 비교적 진보적인 전시단체였으며 구성원들의 의지 또한 매우 뜨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그릇을 만드는 기량은 관심밖이었고 새로운 무엇을 찾아 헤매는 돈키호테적 시절이었으며 그 결과 선생님들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삶, 우리의 삶, 미술의 역할 등에 대해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는 애송이였다. 김수영의 시와 루카치의 종속이론에 몰두했으며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과 오 윤, 케테 콜비츠 등의 판화에 매료되어 흉내내기로 세월을 보냈다. 흙으로 만드는 것보다 판화, 그림 그리고 밤 새 긁적이던 몇 장의 글들로 예술베끼기를 시도했던 풋내기였던 것이다.
대학을 마칠 때가지도 나의 정체성은 없었다. 도예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 결정하지 못했고 내용적으로 자신을 살찌우지도 못했다. 이른바 민중미술의 언저리에서 눈치만 보고 산으로 술집으로 쏘다니기만 하였다. 대학원 진학도 그리 탐탁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가 혼란스럽기만 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등산과 음주, 독서로 세월을 보내다가 2학기에 접어들면서 작업이란 것에 손을 대었다.
이것저것 찝적거리다가 시작한 것이 비도(非陶) 시리즈였다. 아닐 비의 비도는 기존의 도예에 대한 전면 부정, 새로운 조형의 발견이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에 의해 시작한 하나의 시도였다. 물레로 큰 접시를 만들고 몇부분으로 분해한 후 자른 면에 판을 붙여 재조립하는, 약간의 구조적인 조형작품이었다. 쉽지는 않았다. 당시는 기껏해야 석기질 점토에 샤모트를 섞거나 산청토를 조합해서 큰 작품을 할 수 있는 잡토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나름대로의 잔꾀를 얻어 몇 점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큰 상도 하나 받았다.
그래도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손과 입 그리고 사물들의 복제, 전사기법 등에 의한 반구상적 흙장난이었다. 무척 재미있었던 작업들이었다. 흙판을 얇게 잘라 말아서 양 끝에 손과 입을 만드는 것인데 서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고 수화도 조금 공부하여 손가락으로 욕하는 모양, 술잔, 칼 등을 들고 있는 모양 등으로 시끌시끌한 시장이나 혼잡한 길거리 그리고 아웅다웅 살아가는 우리네의 모습들을 표현하고자 했다. 20cm내외의 작은 크기라 다루기도 용이했고 굽는데도 아무 지장이 없었다. 비도 시리즈를 할 때는 오랜 건조시간과 소성시간이 필요했는데 이것들은 만드는대로 구워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작으니까 다른 동료들 작품 사이사이에 끼워서 구워 연료비도 거의 무료였다. 말그대로 꼼지락거리면서 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게 또 재미있다고 어떤 선배님이 거금으로 매입을 하셔서 한동안 잘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흙장난과 병행했던 비도 시리즈는 조금씩 바뀌면서 흙판에 의한 기하학적 구성으로 옮겨갔다. 고화도 소성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옹기토를 사용하였고 1000도 내외의 중온에서 소성함으로 형태와 구조의 변화가 없는, 처음에 의도한 대로 구워지는 작품들을 하였다.
그리고 1986년으로 기억되는 도작가회의 전시회에 흙으로 만든 철모와 별, 기성의 쥐덫, 머리카락 등으로 제작한 작품을 출품했다. 작품의 내용은 워낙 뻔한 것이어서 누가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간단했다. 그러나 후문에 의하면 어떤 저명인사가 작품을 보고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작가는 “민중 도자기”라고 새로운 장르(?)의 출현을 인정하였다고 했다.
사실 그 때의 작품들은 당시의 군사정권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의 표현이었다. 지난 월드컵에서 우리 응원단이 내건 ‘꿈★은 이루어진다’의 별과는 다른 권력욕과 탐욕에 대한 기표였으며 별 즉 스타가 되고자하는 많은 사람들의 욕망을 패러디 한 것에 불과했다. 다만 흙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표현욕구들이 이런 저런 재료들을 끌어들이게 되었고 또 그러다보니 소위 공예적 기본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후 나의 작품은 점점 더 커져갔고 도예라기보다는 조각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으며 몇 군데의 민중미술(?) 성격의 전시회에도 부름을 받았다.
물론 순수하게 흙만을 재료로 한 작품들도 제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화도 스테인이 조금씩 돌아다니기 시작할 때라 재료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점잖은 흙색에서 일탈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겨 한동안 즐겨 사용한 적도 있었다. 치졸한 원색과 검은 색의 드로잉으로 마감한 작품들을 제작함으로서 도예에서의 색의 의미를 반추하기도 하였다.
90년대가 되면서 아주 인상적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진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회 진로도예지명공모전으로 15명의 젊은 작가들이 지명되었고 그 중에 한사람으로 출품하게 되었다. 당시로는 1등에게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작품을 하였다. 전시개막 당일 작품의 일부였던 FRP로 만든 칼이 완성되지 않아 작업실 밖에서 밤새 마무리했었다. 40kg은 족히 될 큰 칼을 그라인더로 갈다가 떨어트려 허벅지를 다쳤던 기억이 있다. 원색과 타재료로 이루어진 다섯 점은 결국 상금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들이었다.
그리고 93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혼합매체를 사용한 대형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작품을 판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마음하나 만으로 시간과 돈을 투자했던 시절이었다. 어떤 해는 한 달에 한 번꼴로 전시회에 초대받아 기고만장했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일본으로 가기 전 작업장을 정리하는데 그 많은 작품들을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동안 부수고 해체하여 트럭 3대 분을 버리고 나니 홀가분함도 있었지만 처참한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일본에서의 작품들은 경제적으로 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회된 시작점이었다. 그렇다고 그릇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석고제형과 전사기법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크기보다는 정교함과 기술적 완벽함에 중점을 두었다. 악전고투였다. 석고는 졸렬함과 소심함이 기본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재료였다. 제형기는 물레보다 더 용서가 없었다. 조금만 중심이 흩어져도 원형은 제형기 밖으로 튀어나갔으며 1mm의 분할선 오차는 원형마저 망가뜨려야 하는 벌을 내렸다. 몰드 제작시 바깥벽을 조금만 소홀히 하여도 그 비싼 석고가 터져 나가 오후내내 청소만 하는 수모도 겪었다.
작품의 크기를 최대한 줄이기로 하되 내용적인 면은 보다 집요하고 풍요롭게 하기로 했으나 기술적 한계와 점토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몰이해는 나 자신을 추스르게 하기보다는 좌절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더욱이 비싼 재료들은 외국에서의 생활을 더욱 압박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작품을 해야 하는 당위성마저 흔들리게 하였다. 어쨌든 일본에서의 생활은 기술적인 미숙함과 처음 접하는 재료들에 대한 한계, 변화된 환경 및 그들이 이루어 놓은 학문적 소프트웨어에 대한 열등감 등으로 점철되었다.
94년 취직이 되어 돌아오면서 나의 작품은 사회현실에 대한 패러디의 범위를 조금씩 더 넓히게 되었다. 군사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내용에서 진일보하여 전쟁이라는 인간이 만드는 비극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의 보스니아 내전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내전으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린이들의 죽음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인형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시종 전쟁에 희생된 어린이들에 대한 내용들이었으며 97년의 개인전까지 지속되었다.
아울러 의과대학 실험실에서 본 낙태아의 표본과 그것들의 유입경로는 나의 작업에 또 다른 주제가 되었다. 수정체부터 10개월의 것까지 시간순으로 표본병에 담겨 있는 태아들은 자연유산으로 추출된 것도 있지만 인공중절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더 많다는 설명이었다.
이후 전쟁의 소재였던 인형은 낙태와 성범죄에 대한 표현으로 전이되었고 인간의 욕정과 원죄를 표현하는 매체로 작용하였다.
돌이켜보면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의 작업은 고상하다던가 아름답다던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개인의 관심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그 결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 확립했지만 제조업자로서의 능력은 빵점이었다. 정확하게 다섯 점의 작품이 남의 손에 넘어갔는데 한 점은 대학원 재학시의 선배가 또 한 점은 1회 개인전 때 대관료 대신 기증하였고 한 점은 어떤 초대전 때 팔렸는데 나머지 두 점은 누가 가져갔는지도 모르고 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랬다. 앞으로도 그런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이 현실참여적인 작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일천한 우리 도예의 역사속에서 장르의 세분화는 절실하다. 그릇을 만드는 것도 추상적인 도조작품을 하는 것도 어느 하나 폄하되어서는 안되지만 내용적 다양함이야 말로 우리도예의 미적 범주를 확산시키는 중요한 견인차이기 때문이다.
작가 홈페이지
http://www.kcaf.or.kr/art500/wookwanho/index.htm
필자약력
1958년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 동 대학원 졸업
개인전 5회(서울, 쿄토, 후쿠오카)
작품소장(서울신문사, 서울시립미술관, 금호미술관, 토 아트 스페이스)
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조교수
「우화_력(寓話_力)」 1989, mixed media, 180x90x300
「비도(非陶)」 1986, 폭80
「욕(慾)」 1996, unf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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