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고 도자회화
글/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순지, 장지에 야생화가 가득 피었다. 화면 가득 펼쳐놓은 듯이 그려 넣은 이 꽃들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으로 작가에게 인식된 것들이다. 군락을 이루어 집단으로 피어오르는 꽃들을 통해 자연스러운 식물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근경과 원경이 모호한 근접으로 포착된 꽃밭이다. 여러 물감을 이용해 그려 놓은 꽃들은 수묵이 홍건하게 스며들고 쭉쭉 펼쳐놓은 배경 앞에 존재한다. 여전히 수묵의 맛들을 유지해나가는 하나의 장치로 기능하는 것이 그 배경이다. 수평으로 길게 자리한 화면을 전체적으로 가득 채운 꽃과 풀이 있고 상단에 숨통을 틔우듯 거칠게 치고 나간 붓의 자취와 농묵의 은은한 경계, 그리고 여백이 자리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야생화가 가득 찬 대지로 적극 유인하는 이런 구도는 육박해 들어가는 긴장과 대상과 직접 맞닦드리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대지를 흩어나가면서 지표에 핀 꽃을 만나게 한다. 자연, 식물의 생명감이 충일하게 가득차 있는 그런 형국의 연출이란 얘기다.
반면 수묵으로만 이루어진 동자 상, 문인석과 무인석을 그린 그림은 석질의 흥미로운 질감과 전통사회에서 특정한 의미만으로 수놓아진 석상들을 통한 문화적 환기로 보인다. 돌 자체가 지닌 무채색을 수묵이란 모노크롬의 세계로 가다듬어 나가면서 수묵의 맛과 돌의 피부에서 연유하는 마티엘을 무척이나 촉각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오만철은 도예를 전공해 손수 도자기를 만든다. 회화를 전공하고 또다시 도예를 전공한 예는 더러 있지만 이 두 세계를 동시에 병행해 가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그는 화가이자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인 셈이다. 화가이자 도공이며 평면이자 입체에 그림을 그리는 이다. 그래서 그는 입체인 그릇의 표면에 그림(도자회화)을 시술한다. 평면과는 또다른 공간에 자연, 산수를 펼쳐보이거나 꽃과 나무를 즐겨 그려놓았다. 종이의 단면에 스며들어 번지고 퍼져나가는 것과 다르면서도 여전히 자연, 식물성의 세계를 흙 위에 서식시킨다. 종이 역시 자연, 나무라면 도자기는 흙이자 대지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려 자연을 다시 되살려 놓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 때에 그는 분청에 철화를 결합하는 방법을 통해 종이에 수묵을 그릴 때처럼 색감이 배어들거나 번지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릇은 불에 넣고 구워내기에 우연한 효과가 무엇보다도 크다. 원하는 대로 제대로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데 바로 그런 요소가 더욱 흥미와 도전을 부추키는 것일 수 있다. 도자기의 표면에 그려지는 그림 역시 불과 시간, 우연적인 힘에 의해 새롭게 구현된다.
반면 그릇과 그림이 이렇게 만나 이루는 경지가 단순히 그릇의 표면에 이미지가 올려지는 것, 수묵의 맛이 되살아나는 것만으로는 아쉽다는 인상이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조선관요에서 도공들이 만들고 화원들이 그림을 그려 만든 명품들을 떠올리며 상대적으로 오늘날 도자기에 되살려 내면서 도자회화의 중요한 성과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평면작업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동양의 수묵그림이 가능한 지점의 모색으로 보여 진다.
현재의 작업은 바로 그 같은 모색의 지난한 과정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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