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태워 피리를 만드는 작업
글/이생진 시인
내가 인사동을 기웃거리는 것은 시 때문이다. 인사동 거리에는 소박한 시민의 시가 있고, 갤러리 안에는 개성이 넘치는 작가의 시가 있다. 나는 시를 읽으려고 인사동을 기웃거린다. 2년 전에 갤러리블루에서 우연히 우화 같은 ‘쾌변’을 만났다.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인연이다. 개구리처럼 웅크리고 앉아 시원스럽게 변을 보고 있는 초벌구이 ‘쾌변’, 거기엔 익살스런 시가 있었다. 그때에도 몸 전체가 하나의 구멍이더니, 이번에도 구멍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발은 유별나게 컸다. 그날 밤 나는 ‘쾌변’에서 시를 따다가 인터넷에 걸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시달리고 있는 갈등을 만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쾌변’이 단세포적인 몸부림이라면 이번 작품전 ‘뚫고 나오다’에서는 현재와 미래, 갈등과 고뇌, 그리고 탈출을 모색하는 청사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울고 있었다. 1250도의 열로 구워낸 눈물의 터널을 뚫고 나아가기 힘들어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의 터널을 뚫고 나가야 작품을 맞게 된다. 흐느끼는 작품은 보는 사람에게 흐느낌을 줘야 작가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이다. 천 개의 눈물을 실에 꿰어 터널을 만든 것은 그의 절규의 터널을 지나가며 직접 손으로 만져보게 한 유인이다. 눈물을 빠져나가면 ‘구멍’이 나온다. 뻥 뚫린 두 개의 구멍이 너무 큰 울림을 준다. 가슴 전체가 입이오 머리통 전부가 입이다. 한 몸에 입이 두 개, 아니 몸 전체가 입이다. 역시 ‘쾌변’에서처럼 발이 크다. 발에 힘이 있다는 것은 작가의 미래가 믿음직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슴의 구멍도 머리의 구멍도 이것은 그가 뚫고 나아가야 하는 긴 터널이다. 물론 이 절규는 가시적이다. 절규 끝에 이어지는 ‘꼬임’, 팔다리가 뱅뱅 꼬여서 머리를 감고 있다. 그러나 큰 다리는 여전히 든든하다. 다음은 ‘우울’이다. 그의 ‘쾌변’의 자세 그대로 이지만 이 작품의 머리는 무릎 위에 숙여져 있고 두 손은 두 발을 감고 있다. 이 눈물의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가장 시적인 장면이 ‘꼬임’과 ‘우울’이다. 눈물을 불에 넣고 태울 때처럼 ‘꼬임’과 ‘우울’을 태울 때 작가의 심정을 읽어가는 것이 나의 시적 체험이다. 작가는 또 한번의 ‘고함’으로 허물을 벗는다. 그 절규와 고함으로 이어지던 갈등은 어느 날 새로운 세계 즉 작은 여섯 개의 구멍이 뚫린 피리로 살아난다. 그리고 ‘내 삶의 구멍들로 노래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임하나의 ‘뚫고 나오기’이다. 나는 전시장을 나오다가 출구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썼다. ‘눈물을 태워 피리를 만드는 여인’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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