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고

Top
기사 메일전송
비움의 미학-유승렬의 항아리들에 관한 소고
  • 편집부
  • 등록 2003-07-15 14:48:52
  • 수정 2016-04-10 22:37:20
기사수정
유승렬개인전 2002. 11. 6 ~ 11. 12 경인미술관 비움의 미학 - 유승렬의 항아리들에 관한 소고 글/김한영 자유기고가 불혹의 문턱을 눈앞에 둔 도예가 유승렬이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산자수명한 고장 안성에 둥지를 틀고 도공으로서의 천업(天業)을 이어온 지 아마 적잖은 시간이 흘렀건만 첫 번째의 개인전이라니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허나, 사려 깊은 태공은 섣부르게 낚시채를 잡아채지 않는 법. 그런 연유일까. 그가 그 세월의 풍상에 삭여온 그릇들의 매무새가 범상치 않다. 한때 다양한 기법적 실험에 천착하면서 다채로운 도자조형적 표정과 빛깔을 탐색하던 그가 이제 비로소 자신의 성정(性情)을 담을 수 있는 물건들을 건져 올렸다고 할까. 그것은 작가로서 한 획을 긋고 새로운 좌표를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간헐적이긴 하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작업의 궤적을 지켜본 글쓴이에게 그의 근작들에서 드러나는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측면은 백색과 여백의 (재)발견이다. 그릇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렇게 있게 하고(自己如此) 스스로 말하게 하려는 작가의 웅숭깊은 속내 또한 확연하다. 그것은 ‘백색’과 ‘여백’, ‘비움’을 사안(私案)의 화두로 삼아 치열하게 매달린 모색과 실험의 산물임에 분명하다. 백색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한때 우리는 그 백색을 ‘지아비를 잃은 여인네의 상복에 처연히 배어든 슬픔의 빛깔’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인 모티브로 구사하는 백색은 모든 색을 다 끌어 안은 궁극의 색이요, 무념과 절대의 공간으로 비상하면서 자신을 사르는 불멸의 색이며, 무애(無碍)와 허정(虛靜)의 세계를 표상하는 의지의 색이기도 하다. 여백은 또 무엇인가. 단지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빈 공간으로서 소극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비상케 하는 적극적 공간 아니겠는가. 그에게 여백은 무엇인가 그려 넣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음의 강박, 즉 공간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그가 사물과 감성적인 관계를 맺는 마음의 공간이다. 이 백색과 여백은 자기를 버림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색과 여백이 불러일으키는 심미적 체험의 근간은 방하(放下)의 미학이요, 비움의 미학이다. 비움은 동시에 텅빈 충만이요, 가득찬 공허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유승렬은 일상과 자연에서 얻은 작가의 내적 체험을 위태로우리만치 당당하나 억지스럽지 않고 펑퍼짐하면서도 품위와 격조를 잃지 않은, 고아담백하고 온후질박한 항아리들에 올올이 새겨넣었다. 그리하여 그의 항아리는 불현듯 빚은 이의 허정(虛靜)한 마음과 청정한 자연의 기운이 만나는 지점으로 전화한다. 이 지점에서 미(美)와 용(用)의 이분(二分)은 더 이상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다. 그를 이 지점으로 인도한 것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전통이라는 거대한 영감의 뿌리에 대한 눈뜸일 터이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쓰임’이라는 문맥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도 기물이란 빚어낸 이의 미적 체험이 투영되고 생활감정이 배어들기 마련이다. 그의 기물들이 우리들에게 환기시키는 체험은 치열한 모색의 여정, 그 어느 모퉁이에서 불현듯 맞닥뜨리게 되는 그런 체험일 게 분명하다. 이제 그에게 문득 깨달음이 된 자신의 업과 사명에 대한 각오(覺悟)가 애오라지 그 불멸의 빛깔과 더불어 가일층 고양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기사를 사용하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s://www.cerazine.net

 

0
회원로그인

댓글 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세로형 미코
이영세라켐
02이삭이앤씨 large
03미코하이테크 large
오리엔트
미노
삼원종합기계
진산아이티
케이텍
해륭
대호CC_240905
01지난호보기
월간도예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