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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흙으로 빚은 토인土人의 자생주의적인 미학
  • 편집부
  • 등록 2007-05-17 15: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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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 Review /허 은 숙

글 김유정_미술평론가

쥘흙으로 빚은 토인土人의 자생주의적인 미학

제주에 온 목민관이나 유배인들은 제주사람을 가리켜 토인土人이라 했다. 분명 자신들과 다르다는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토인이라는 표현에는 은연중에 중화 선진 문명의 혜택에서 멀다는 뜻과 미개하여 교화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들어 있다. 물론 외지인들의 생각이다. 그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때 토인이라 불렀던 사람도, 불리던 사람도 가고 없다. 화산섬은 토인의 후세가 쥘흙만을 남겨둔 채 사방에서 달려드는 바닷물에 씻길 뿐이었다.
그러나 토인의 누운 땅에서 쥘흙을 본 사람이 있다. 지난달 열린 허은숙의 <화산땅 쥘다기>전은 시간 속에 사라진 토인의 의미를 부활시킨다. 이제 토인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전복적顚覆的인 의미를 갖는다. 그 토인이라는 말의 ‘의미바뀜’은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 혹은 그것을 복원해야만 ‘대안이 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반적으로 흙은 지모신의 상징이다. 당연히 인간과 생물을 키우기 때문에 생긴 관념이다. 하늘이 남성적 관점에서 비를 뿌리면, 흙은 여성적 관점에서 만물을 키운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결국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모두 흙에서 나왔다는 결론이다.
토인은 없지만 토인의 사상은 제주에 남아있다. 그것은 소위 중앙 추종주의라고 부르는 도시적 표현의 맹목적 답습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토인의 사상이란 고립되었던 시간을 해방하고, 왜곡되었던 생각을 곧추세우고, 잃어버렸던 전통을 한데 묶는 ‘자생주의自生主義’라 할 수 있다. 자생주의는 과거의 토인들이 스스로 해결했던 것 이상을 넘었던 힘의 원천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생주의야말로 바로 오늘날 예술의 진정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예술이란 창의적 끈기의 싸움이듯, 예술가란 자기 양식으로 시작하여 자기 양식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싸움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운명처럼 감내해야할 진리이다. 그러기에 이 자생주의는 우리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번 허은숙의 <화산땅 쥘다기>전에서 보여준 것처럼, 토인의 이념을 계승하는 자생주의가 그의 관념적인 기반이라면, ‘더부룩하고 조지록하게’라는 제주도공으로부터 계승된 조형원리는 바로 그의 창작방법이 된다. 이 ‘더부룩’이란 든든하고 듬직하다는 안정감의 정적인 미학원리를 말하는 것이고, ‘조지록’이란 역동성과 유연성 때문에 돋보이는 동세動勢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더부룩하고 조지록하게’라는 조형원리에서 출발한 허은숙의 도기는 소박주의로 귀결된다. 제주사람들의 흙살림을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곁에 있기에 소중한 것임을 모르는 무지를 깨고, 화산흙에서 민중의 미의식을 찾는 손의 끈기는 쥘흙을 필요로 했다. 그는 시간의 너울을 넘어온 기층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박미를 창출한다. 인간의 깊은 성정性情에서 완성된, 가장 넓은 의미의 대중적인 미감을 매듭짓고자 함이다.
꾸며서 아름다운 것보다는 놓여서 편안한 너그러움이 좋은 것처럼, 허은숙의 도기들은 천연의 자연을 옮겨온 것이다. 제주의 전통 옹기들의 색과 형태를 계승하는 오랜 시간의 흔적은 토인들의 생명과 자생력의 원천이었던 화산섬의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에 의해 비로소 자신의 무늬를 남기고 있다.
오로지 화산흙을 쥐고, 오로지 손으로 빚고, 오로지 불바람으로 완성된 화산땅 쥘다기는 자연과 인간, 전통과 오늘을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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