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Lee Jae Jun - 전환의 극점, 이후의 향방성
우관호 홍익대학교 도예·유리과 교수
지난 11월 29일부터 12월 5일 까지 인사동의 덕원갤러리에서 열린 이재준의 개인전은 근래 보기 드문 노작勞作이라는 점에서 정량적 가치가 있었다. 작품의 주류를 이루는 대형 인물상들은 이재준이 늘 지켜 왔던 범주내의 것으로서 뭉뚱그려 말한다면 3년여의 작품에 대한 정리 또는 결산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전시장 한 켠에 다소곳이 늘어놓은 몇 점의 두상들과 돌을 도입한 스트리트 퍼니쳐와 같은 것들이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모색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이재준이 주제로 내세운 「벅수-Guardian of the Nature」는 말 그대로 자연을 지키는 장승이다. 작가의 말을 빌어보면 ‘벅수’는 매우 역설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단순한 형태의 복제’가 아닌 ‘개념의 차용과 변용’이라고 굳이 설명하고 있으며 표피적으로 보이는 내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곧 인간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지키려는, 소위 의식전환의 결과물로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준의 초기 인물상들과 비교하면 좀 더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 초기의 것들은 형식보다 내용이 중시되는 다시 말해 인물의 표정과 동작에서 희화적인 요소들이 진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가 쉬운 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인물상들은 세부가 생략되기 시작하
였고 동작 또한 정면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적 형식의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작가의 말대로 반구상, 반추상화라고 단정하는 것이 타당할까? 이재준의 ‘벅수’를 보면서 그리스 미술의 독자적 업적이라고 지칭되는 이상주의를 대입한다면 ‘현학적 아부’가 될까? 물론 현대미술과 조각에서도 유사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벅수’의 구조와 비견되는 소위 이상주의적 사례는 아티카 출토의 ‘서 있는 소녀들’과 델피의 ‘클레오비스’ 그리고 ‘보에오티아의 아폴론’ 등이 있다.
이들 조각에 대해 허버트 리드는 “유사점이란 똑같은 정면 포즈, 똑같이 정확한 대칭, 여전히 뚜렷한 선의 강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하학적인 것은 잠재되어 있으며 상징적인 추상이라기보다는 보조적인 구조이며 그 둘레로는 리드미컬한 대위법이 유기적 의미를 가지고 짜여져 있다. …중략… 그러나 그 성숙한 양식의 성질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이상주의로 불리며...”라는 언급을 통해 그리스 인체조각에 대한 자리매김을 시도하였으며 나아가 헤겔의 논지를 인용하여 보다 궁극적이고 구체적인 부분으로 접근하였다.
“조각이란...정신이 전적으로 재료의 매체 속에서 스스로 상상토록 만드는 놀랄 만한 투사投射를 생각한다.”고 말한다. “조각에 대한 이러한 인격화는 받아들이기는 좀 난처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미술을 어떤 외적 도덕성이나 윤리성의 단순한 도구로 만들지 않고 미술안에 그 모티브의 힘을 두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소 장황한 감이 없지 않은 인용이지만 위의 글 가운데서 이재준의 작품에 빗대고 싶은 것은 “미술을 어떤 외적 도덕성이나 윤리성의 단순한 도구 …중략… 그 모티브의 힘을 두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 말은 이재준이 표방하는 주제와 그것의 전개에 따르는 다소 감상적이면서 겸손한 태도가 시기상조이며 과유불급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현대도예에서 인체를 모티브로 하는 작가와 작품의 사례는 부지기수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재준의 작품에는 기대할만한 가능성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의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 역시 작가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 미리부터 주저앉아 버리면 그것보다 안타까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한 몇 점의 두상에서 보여지는 색과 질감의 깊은 맛과 스트리트퍼니쳐로서의 모색은 제외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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