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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한 사유의 장소
  • 편집부
  • 등록 2007-02-02 17: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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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에 관한 사유의 장소

문화적 기억-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
2006.11.10-2007.1.28 일민미술관

 박영택 _ 미술평론, 경기대 교수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전시는 일종의 사료적 성격이 강한 전시이다. 그의 행적과 그가 쓴 책들, 그리고 그가 소장한 미술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고 또한 동아일보사와 야나기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도 있다. 전시장 전체는 야나기란 한 개인의 삶과 학문, 감식안의 동선을 유도해내는 배열과 물적 증거들의 세심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 동선을 따라 가다보면 1920년대로 거슬러서 오늘에 이르는 긴 여정이 한 눈이 밟힌다. 사실 야나기만큼 한국미술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토록 많이 논의된 외국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전시는 부재했었다. 이 사실도 좀 의아스럽다.
1920년대 문화주의의 맥락에 서있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21차례에 걸친 한국예술체험여행을 했다. 그 누구보다도 한국을 가장 많이 여행한 외국인이다. 그는 아사카와 다쿠미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 설립운동을 벌였고 도자기를 위시해 한국의 미술품을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그리고 다양한 한국의 인공물들에서 한국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를 유려한 문체로 기술했다. 그의 감식안과 논의에 의해 새삼 환생한 조선의 민예품을 통해 조선인은 자국의 문화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전까지 전통에 대해 조선인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것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야나기는 기억상실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과거의 이미지를 망각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일본인의 미의식이 덮어씌워진 조선의 미의식을 선사하고 그것을 ‘무의식’의 존재로 자리매김 시킨 존재다. 예를 들어 한국의 도자기는 한국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의 아름다움은 일본인의 산물, 즉 일본인의 눈이 그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일본인의 눈과 감성이 없었다면 조선의 미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한국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의 장으로 초대된 것’(강영희)이다. 그러니까 일본 다인의 안목과 조선 도공의 무지를 대비시키고 일본인의 미의식과 한국인의 무의식을 대립시키는 그의 주장 속에는 은연중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차가운 시선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무지한 도공이 만들었던 무의식의 소산이라는 도자기는 사실 실질적인 소비자이자 주문자인 조선 선비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선비들의 깐깐한 안목과 절제와 검박한 미감이 없었다면 그런 백자도 없었다. 그러니까 야나기가 사랑한 것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창조된 한국도자기가 아니라 일본인의 미의식에 따라 향유된 또 하나의 한국 도자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백자란 고도의 정신적인 수양을 비롯한 피나는 단련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며 다시 그 같은 경지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을 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경지였다. 어쨌든 그의 대표적인 한국미에 대한 논의인 비애미론은 한국예술의 정체성에 관한 최초의 미학적 문제제기였다. 이런 야나기의 영향은 이후 한국미술에 해심적인 것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인지 야나기는 1984년 대한민국정부가 주는 일본인에게 준 최초의 훈장인 대한민국보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는 분명 조선의 예술을 극진히 사랑했고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놓은 기물, 작품의 본질을 잘 헤아려본 자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이해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풍성하게 가꾸기 위한 참조자료로 적극 사용되었다. 그는 일본의 민예미와 일본의 미의식을 해명하고 연구하기 위해 조선의 예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미 교수의 지적처럼 “조선미술은 그의 직관과 사유에 심층을 부여했으며 그로인해 그는 일본과 일본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구비할 수 있었다”반면 그의 논의는 한국인에게는 미의식을 상실하는 계기로 작용했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야나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닐 듯싶다. 다만 여전히 중요한 일이라면 그의 사상과 논지를 좀 더 정확히 살펴보고 이해하는 일, 그리고 그 당시 일본과 조선의 상황 속에서 그런 논의가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 같은 것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일본과 한국의 미술교류와 인정, 판단의 문제에서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1916년, 첫 조선방문. 신라시대의 해인사 탑 앞에서 두 번째 조선방문.
경성 태화정에서 찍은 사진이다.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야나기 무네요시
진사호작문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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