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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의 합일로서 원圓의 미학 - 원복자
  • 편집부
  • 등록 2007-01-03 15: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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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극의 합일로서 원圓의 미학 - 원복자

글 노영덕 _ 미술평론가

 

원복자의 작품을 보고 그 작가가 여성일 것이라고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의 작품에는 어떤 강한 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박한 흙의 거칠음이 그대로 남아있는 채로 그 위에 부분, 부분 황금이 발려져 억센 원을 이루는 그의 작품은 원 속의 힘찬 소용돌이 문양과 함께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원 속으로,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얼핏 무속적이거나 주술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원초적이고 적나라하다.
스스로 밝혔듯이 원복자의 작품은 욕망을 다룬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에 흐르고 있는 알 수 없는 힘은 아주 원시적이고 거친 에너지로서 우주에 흐르고 있고 인간에 잠재해 있는 어떤 디오니소스적 욕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욕망이란 단순한 결핍에 의한 갈증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탄생시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에너지 그 자체이다. 하지만 원복자의 작품에서 이 욕망이라는 에너지 덩어리는 날 것 그대로의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고차적인 통합의 원리로 승화되어있다.
‘욕망이 존재한다’함은 이미 그와 정반대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에너지가 에너지라는 특정의 것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한정해줄 수 있는 배경적 타자가 필요하다. 그 배경적 타자로부터의 한정에 의해서 어떤 존재는 비로소 특정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존재’는 ‘비존재’와 구별되는, 비존재로부터의 어떤 ‘한정’이다. 그래서 ‘존재’는 ‘비존재’를 필요로 한다. ‘있음’이 있기 위해서는 그 ‘있음’ 만큼의 ‘없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 반대되는 두 개가 사실은 하나라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은 자신의 단순한 대립자가 아니라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필수적으로 동원되는, 자신을 비춰줄 수 있는 거울이다.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나와 거울 속의 나, 이들 둘은 모두 올곧은 ‘나’가 되기 위한 하위의 대립항인 셈이다. 이렇게 일체는 자신보다 하위 차원의 존재인 이원의 합으로 성립된다. 낮은 차원에서 대립 관계에 있는 둘이 고차적인 하나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이요, 역易의 원리이다. 이는 우주 삼라만상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리이다. 모든 것은 자신과 정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립이 가능해지며 그 정반대 것에 의해서 오히려 움직여진다.
이것은 바로 낭만주의 사상이다. 낭만주의 사상은 통합의 형이상학을 그 근간으로 하는데 이는 나누어진 것, 반대 되는 것, 모순되는 것의 종합 또는 화해를 의미한다. 그래서 낭만주의시기에 우주는 현재 존재를 유지함과 동시에 자신의 기원이 되는 초월적 ‘하나Unity’를 이루려고 하고 있는 반대적 힘의 역동성에 의해 활동되어지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낭만주의 사상은 고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를 그 주된 배경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일찍이 5세기에 신플라톤주의자인 프로클로스Proklus, 412~485는 신플라톤주의의 태두 플로티노스Plotinus, 204~270의 일원론적 존재론을 떠맡는다. 초 존재이자 만물의 시작이 되는 일자一者, to hen에서 비존재이자 끝이 되는 질료Hyle가 유출Emanation과 테오리아Theoria에 의해서 하나로 연결되는 이 신비한 플로티노스의 존재론을 프로클로스는 존재의 원환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유출에 의한 하강과 테오리아에 의한 상승은 프로클로스에 의해서 이제, 일자에서 시작하여 일자로 되돌아가는 하나의 순환적 ‘원圓’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환운동은 순환적 일원론이 되어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그리고 낭만주의로 계승되었다.
특히 중세 말, 독일의 쿠자누스N. Cusanus, 1401~1464에 의해 이 사상은 이제 ‘대극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개념으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정 반대되는 것이 사실은 하나라는 이러한 사상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바로 원이 된다. 즉 시작과 끝, 극과 극을 연결함으로서 하나가 되어 이원론을 극복하는 원은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대 통합의 기하학적 도형인 것이다. 19세기 말 다시 일어나 추상회화 등 당대 예술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서 원이라는 도형을 그토록 중요시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복자의 작품은 이런 대극의 합일로서 원의 미학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흙과 금, 가장 흔하고 토속적인 것과 가장 귀하고 귀족적인 것이 함께 섞여있다. 그리고 바탕이 되는 흙에 시유된 청자유와 흑유는 그 위에 삼벌번조로 입혀진 황금과 대립되는 짝을 이룬다. 이때 역설적이게도 바탕의 청자유와 흑유가 짙으면 짙을수록 겉의 황금색은 더욱 밝게 빛난다. 마치 타나토스가 강하면 강할수록 에로스가 강화되듯이. 깊은 어둠 속에 이미 밝음이 잉태되어 있듯이.
흙과 금의 이 기본적 대립 관계는 어둠과 밝음은 물론이요, 투박함과 화려함, 원시와 문명 간의 대비로 그 대립관계를 이어간다. 거기에 순수도예의 개념과 장식의 개념이라고 하는 또 다른 대립쌍이 개입된다. 이렇게 원복자의 작품은 정반대에 존재하는 두 개의 쌍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이런 두 쌍의 대립관계를 그 관계가 유지되도록 대위법적으로 병치한 치밀함에 있지 않다. 이 작품의 핵심은 그런 관계에 있는 두 대립자를 통합하여 하나의 원으로 차원적 상승을 이룬 데에 있다. 즉 흙으로 상징되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과 금으로 은유되는 가장 문화적인 욕망이 모순을 지양하여 하나의 원 속에서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어둠, 자연, 원시, 도예가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밝음, 문명, 세련과 장식과 하나가 되어 원 속에 녹아있다. 음양의 조화로서 대 통합의 이 원은 바로 대극의 합일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바로 소용돌이 문양이다. 소용돌이 문양, 즉 원 속의 원은 구심적 메타원리와 원심적 일탈의 원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순적인 것으로, 대극의 합일 중의 합일이다. 원으로 통합된 대립되는 두 쌍들은 쉴 새 없이 일탈하여 원래의 대립적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소용돌이의 구심력에 의하여 그 힘의 무게만큼 안으로 끌어 당겨져 영원히 그 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극에 존재하면서 하나로 얽혀있고 하나로 통합되어져 있으면서 그로부터 분리되어 벗어나려고 하는 이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가 원과 소용돌이에 그대로 표현되어져 있는 것이다. 
원복자의 작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빛이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작품과 관객이라는 대립적 관계마저 무화시키고자 한다. 디지털 영상의 사용이 그것인데, 빛에 비추어진 도자기 작품이 영상에 투영되고 그 화면 사이사이로 관객의 모습이 함께 영사된다. 화면상의 작품을 바라보던 관객은 어느새 그 작품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작품과 관객이 함께 어우러진 화면 속에서 둘은 하나가 된다. 즉 작품으로부터의 미적체험이 관객 자신이 스스로를 느끼는 자기체험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영상매체와의 새로운 융합을 통해서 도자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함은 물론 조형예술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또한 전통과 현대의 합일적 융합이라고 하겠다.
낭만주의 미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원복자의 작품은 그렇게 우주적 원리를 그려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또한 숭고의 미학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찍이 칸트I. Kant는 숭고를 가리켜 ‘제시할 수 없는 것의 제시’라고 요약한 적이 있는 바, 낭만주의의 핵심 개념인 대극의 합일 원리는 비합리적인 것이자 논리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원복자의 작품은 숭고의 미학에 반쯤 걸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고 있고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문명의 세련이 가미된 그의 작품은 그러한 모순성 때문에서인지 무속의 분위기를 뛰어넘어 어떤 초월적 종교성을 느끼게 한다. 이때 이 작품에 담겨져 있는 그 샤먼적인 힘은 표현의 억셈과 함께 관객으로 하여금 인식범위 바깥의 영역, 즉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언질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칸트 식으로 말했을 때 이렇게 약간의 주술적인 두려움을 선사하는 이 작품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그 강한 힘은 분명 ‘역학적 숭고’에 해당할 것이다.
숭고의 미학은 낭만주의 미학의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있다. 앞으로 그의 작품이 과연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질지는 물론 차후 작가의 몫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하나의 방향성이 설정되던지 아니면 또 다른 실험이 이루어지던지 간에 여성의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우리만큼 대단히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드는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해 본다.

 

필자 노영덕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와 상명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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