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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의 재조명 - 현대시각으로 본 고려청자의 의의
  • 편집부
  • 등록 2006-08-01 1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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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청자의 재조명 - 현대시각으로 본 고려청자의 의의

글 장기훈 _ 조선관요박물관 학예연구팀장

한국의 도자전통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 중 하나는 고려청자이다. 우아한 형태와 곱디고운 비색, 상감청자와 진사청자에 드러난 기술력, 이러한 것들은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우수성은 오늘날 우리의 자부심으로, 한편으로는 고려청자를 어떻게 새롭게 인식하고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청자는 최초의 자기磁器이다. 신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처음 점토로 그릇을 굽기 시작한 것은 대부분의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토기의 재료와 기술을 개선하고 고온번조 하면서부터 그릇 표면에 유약을 씌우는 시유도施釉陶로 발전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때부터 도자기는 동아시아의 고화도 회유灰釉와 서아시아·유럽의 저화도 연유鉛釉로 크게 나뉘면서 각각 고유의 도자문화를 형성하고 또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동아시아는 풍부한 양질의 점토와 땔감을 이용하여 고화도 번조함으로써 회유에 이어 청자유靑磁釉를 발명하고 다시 투명한 장석질 백자유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음식기를 중심으로 한 일상생활용 도자기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의 결과였다. 그러나 자기질 태토와 연료가 흔치 않은 서아시아·유럽은 오랫동안 저화도 도기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기종器種에서도 음식기 등의 비중이 낮아진 반면 손쉬운 제작과정과 채색을 이용한 다양한 장식용기가 발달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중세에 두드러져 중국과 한국은 가볍고 단단하며 옥玉 같이 아름다운 자기, 즉 청자를 만들 수 있었다. 중국의 청자는 상주(商周)시대 원시자기에서부터 남북조南北朝, 4~5세기시대를 거쳐 당唐, 618~907년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리고 청자가 고급화되고 확산된 시기 역시 당의 중앙집권적 귀족사회를 해체시키고 지방분권화의 계기가 된 안록산의 난(755년)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일상용기에서 청자의 사용이 급증하고 주변국가에도 널리 소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실크로드와 해상루트를 따라 동남아는 물론 서아시아, 터키,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청자의 뛰어난 기능과 깊은 아름다움이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 청자의 영향을 수용하여 독자적으로 청자를 생산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나라는 한국(고려) 뿐 이었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서·남해안 등 각 지역을 중심으로 등장한 호족세력들은 중국 청자를 수입해 쓰면서 그 뛰어난 아름다움과 실용성, 산업적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이해할 수 있었고, 9~10세기경 드디어 발달된 경질토기 기술을 바탕으로 절강성浙江省 월주요越州窯의 기술진을 영입하여 청자제작에 성공하였다. 중국이 2000여년에 거쳐 완성한 청자를 불과 한 세기안에 성공하고, 나아가 세계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려청자의 성공은 자연스럽게 조선백자로 이어졌으며, 대체로 16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백자는 세계로 뻗어나가 아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세계는 백자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대의 도자기술, 도예, 문화 대부분이 백자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백자의 전통이 회유도기를 모태로 한 동아시아의 청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역사상 진정한 청자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중국과 한국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려청자는 서구의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장구한 자기의 역사를 온전하게 이어주는 현대도자의 근간인 셈이다. 고려청자가 현대인에게 주는 가장 큰 의의는 바로 이 점이며, 세상에서 사라진 지 500년이 넘은 고려청자가 오늘날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고려청자의 전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있다. 도예가에게는 외국의 어느 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조형의 원천과 영감을 제공하고, 수요자에게는 진정으로 도자기를 쓰고 애호할 줄 아는 고급 자기문화磁器文化의 경험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고려청자를 애호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즉,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아름다운 청자는 열개 중에 하나를 얻을 만큼 만들기 어렵다”고 하면서, 그 솜씨는 “마치 하늘의 조화를 빌린 것”이라고 고려청자를 찬탄한 바 있다.
남송南宋의 수집가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에서 천하의 명품들을 논하는 가운데, “백자는 중국의 정요定窯백자가, 청자는 고려의 비색청자가 천하제일이다”라고 설파하였다. 또 1123년 고려를 다녀간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은 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徑』에 “고려청자는 색상이 아름다워 고려인들 스스로 비색翡色이라고 부른다”거나 “청자사자향로 역시 비색인데 가장 정교하다”라는 등의 감상기를 적고 있다. 이와같은 기록들은 당시 중국의 상류사회에서도 고려청자에 대한 무한한 동경의 풍조가 일고 있었음을 잘 알려준다.
고려청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분청사기로 이행하고, 그 전통이 백자로 전해지면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청자에 대한 기억과 애호의 태도는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4 만물문萬物門에는 앞서 예를 든 태평노인의 『수중금』을 인용하여 ‘천하제일의 고려청자’ 기사를 수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완당집阮堂集』 3권 서독書牘에는, 어느날 그에게 보내온 김생 중유中游의 칠언시를 읽어본 뒤 “마치 옛 거문고의 매화 흔적같기도 하고, 옛 청자의 비색 같기도 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즈음에 더욱 정채精采가 뛰어나다”며 고려청자와 비교하여 시를 평가하는 대목이 전한다. 이 두 기록은 당시의 문인사대부 사회에도 익히 고려청자의 우수성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밖에 조선시대에 실제로 고려청자가 남아 전해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는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집 시문집 6권 송파수초松坡酬酢에는 “늦가을에 김우희金友喜가 향각에서 수선화분재 하나를 보내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시대 것高麗古器이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고려청자에 대한 관심은 시대가 변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그 우수성에 대한 인식과 자부심 또한 여전하였다. 

개항(1876) 이후 근대기 고려청자에 대한 시각은 주로 일본인들의 취향에 따라 맞추어졌다. 그리고 이 시각의 문제는 고려청자를 고가로 거래되는 골동품으로 인식한데 있었다. 따라서 ‘고려청자의 재현’이라고 하는 신성한 도예작업이 타의적으로 골동품의 대체물을 만들면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 고려청자 모조품이 유행한 배경은 1905년 전후 무차별하게 이루어진 고려왕릉의 도굴을 배경으로 일본인들에게 일어난 고려청자 애호열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붐을 타고, 일제가 개입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에서 생산된 전통자기는 외형적으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말기 도자와 고려·조선도자의 형태 및 장식기법이 결합된 국적불명의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는 1908년 평안남도 진남포에 도미타합자회사富田合資會社의 개량도기조합을 설립하고, 1911년에는 본격적으로 서울 묵정동에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라는 청자모조품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32년 신설된 선전 즉, 조선미술품전람회朝鮮美術品展覽會의 공예부에서는 조선의 향토색을 강조하면서도 일본미술과의 동화同化를 추구한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반영하듯 고려청자와 일본도자 모조품들이 주로 출품되었다. 이처럼 근대기 고려청자에 대한 인식은 그 의의를 바로 이해하기에 앞서 골동품적 관심에 따른 시각적 재현의 대상으로 뿌리내렸던 것이다. 이점은 오늘날 한국전통도예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고려청자에 대한 시각과 미감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는 점에서 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부분이다.

고려청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귀하고 신비로운 대상에서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의 대상으로, 또 수집과 재현의 대상으로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시각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우리는 줄곧 고려청자를 가까이하고 즐기는 전통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고려청자를 바라보는 현대의 시각은 고려·조선시대나 우울했던 근대와 또 다르다. 그리고 기술은 발전한다. 1000년 전의 도자기술을 재현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 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다. 나아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고려청자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현대에 접목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려청자는 한국현대도자의 근간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고려청자가 주는 교훈은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청자라고 하는 훌륭한 소재를 현대인의 생활문화와 감성에 맞게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청자문화를, 전통 속에 숨어있는 미감을 재현할 때 비로소 올바르게 전통을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약력
홍익대학교 박사과정 수료(도자사)
덕성여대·국민대·단국대 강사
전 해강도자미술관 학예연구과장
현 조선관요박물관 학예연구팀장 , 문화재청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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