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평 남짓의 작업장 테이블 위로 가득히 비닐을 뒤집어 쓴 채 많은 날들을 기다려온 분청토의 반 건조된 기물들이 잘 정돈되어있다. 오늘은 작품의 그림을 완성해야 될텐데 마음을 추스려 보지만 도무지 마음은 안정이 안 되고 왠지 모르는 봄날의 취흥일까 밖으로만 눈이 간다.
해지는 저녁 무렵 밖은 점차 어두워지고 마음은 조금씩 차분해지며 스믈스믈 몸 한구석을 비집고 나오는 나 자신의 또 다른 나를 다독거린다. 하얀 백토분장, 손 씻을 물 한바가지, 억지로 분질러놓은 거칠거칠한 나뭇가지 붓, 수수빗자루 귀얄, 대나무 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숨을 고르며 마음 저 깊은 심연의 고요함을 깨우며 온몸 구석구석으로 긴장된 절정의 분출을 느낀다.
분청토로 만들어 놓은 기면 위에 하아얀 색의 분을 칠한 후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백토분장의 물기가 기벽으로 스미기 전에 손으로 휙휙 걷어내고, 거친 나뭇가지로, 수수귀얄로 획을 그으며 나만의 격정의 도취된 세계로 들어간다. 이 시간만큼은 언제나 긴장과 설레임의 화려한 유희의 시간인 것이다.
내 온몸으로 느끼는 열정의 순간들은 분장토에 흙투성이가 되면서 애틋한 생명의 창조물인 양 긴장과 엄숙한 의식을 치른 듯이 하나하나씩 그 해맑은 자태를 들어낸다.
분청의 형식을 빌어서 나의 작업을 해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나만의 분청 작업은 표현 형식상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분청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선의 느낌을 극대화한 반 추상적인 크로키형 분청이 초기의 경향이라면, 최근까지는 동양적 운필의 기상과 백토분장의 여백미가 조화를 이루는 추상적 산수화풍의 표현이 주를 이루며, 마지막으로 귀얄분장의 즉흥적 제스처가 전면에 극대화된 형식이다.
크로키형의 분청은 주로 손가락, 대나무 칼, 금속칼 등을 이용하여 속도감 있게 분장을 긁어내거나 선을 그어서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드로잉 방법은 반쯤 건조된 기면 위에 백토분장을 귀얄로 칠하는 방법, 덤벙 또는 바가지로 기면 위에 붓는 방법으로 입힌 후, 분장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손이나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분장의 흰색을 걷어내어 철분을 함유한 태토의 진한 색과 흰색분장의 색상대비를 이용하여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드로잉은 백토분장의 물기가 기벽으로 스며들기 전에 완성해야만 수채화같은 맑고 청초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아무렇게나 둘러쳐진 듯한 귀얄의 흔적, 손놀림 하나하나에도 조형성이 부과되며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드로잉기법은 전통 도예기법인 분전, 옹기 등에서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회화적 이미지를 좀 더 현대적인 회화 방법을 접목시켜 표현한 것이다.
기형은 복잡한 형태보다는 회화적인 드로잉에 적합한 기형을 선호한다. 편병, 사각 호, 접시, 항아리 등이 대부분인데 모두 그림을 그리기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나의 작업에서 기면 위의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그것은 장식의 무늬로서가 아닌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공간으로서의 그림이며 친근하며 거침없고, 소박하면서도 간략한, 그리고 여운이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한다.
작품의 표현은 대부분이 추상적이고 속도감 있는 선과 선의 조화 혹은 붓으로 획을 그어놓은 듯한 몇 개의 점들 그곳에 물에서 유영하는 오리가 있다. 이러한 문양의 배경은 우리의 전통적 회화나 서예 글씨, 공예문양 양식에서 많은 표현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한 모습들이 도예만의 방법으로 글을 쓰듯 그림을 그리듯 필력을 모아 획을 긋고 하다보면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만의 아름다운 심상적 추상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이 순간 나는 예술가가 아닌 가장 행복한 감상자로서의 희열의 시간을 갖는다. 카타르시스와 선의 세계를 느낀다 -이것이 내가 이러한 작업을 하게된 가장 첫 번째 이유이며 내 작품속 생명의 근원이다- 그리고 마음의 긴장을 풀고 좀 더 구체적이고 대중과의 대화가 가능한 이해되기 쉬운 오리가 유영하는 모습이 들어가면 불규칙적이고 난해하던 선들의 모습은 어느새 호수나 물가의 나무나 수초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다시 일상의 편안함으로 돌아온다. 이 오리는 관객과 작가와의 연결고리로서 표현내용을 추상적인 쪽에서 좀더 편안한 일상적인 느낌으로 전환시켜준다.
드로잉 작업을 위해서 스케치북에 미리 견본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미리 정해진 각본같이 나의 마음에 선입견적인 부담감 없이 즉흥적이고 작품이 하나 끝 날 때마다 이전 작품의 느낌을 고려하여 다른 표현의 감흥을 갖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고 작업의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우연의 효과로 인한 새로운 형식과 표현요소를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의 작업의 생명력과 전통적인 코드를 이용한 현대적인 회화성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작업을 대부분 마쳐야 되기 때문에 즉흥적이면서도 순간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냉철함이 있어야만 작품을 군더더기 없이 마칠 수 있다.
이 짧은 시간에 마음에 드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종결된다. 항상 좋은 그림만을 그릴 수는 없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많은 작품을 만들어 본인을 작품의 부담감으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항상 좋은 모습의 작가로 보여 지기를 기대한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며, 과장이나 억지스러움 없이 오랫동안 숙련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도화된 작위성으로부터 터득된 흙과 불,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갖기를 바란다.
작가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졸업(도예전공)
IAC 회원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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