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7 - 2004.7.13 통인화랑
‘나’를 깨닫는 행위
글 김호균 _ 자유기고가
흙은 그 원초적인 속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체험되는 질료다. 촉각적인 흙은 물레에서 그것을 주무르는 사람의 손을 거치면 인공적인 ‘형태’로 전환된다. 다시 번조 과정을 거치면 ‘그릇’, 즉 미와 기능을 갖춘 견고한 조형적 실용품(한편으로는 감상용 작품)이 된다. 가장 자연적인 질료인 흙이 인간의 손맛 감각 물리·화학적 변용 등을 거쳐 완벽한 인공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공적인 조형물에서 역설적으로 자연의 이미지와 느낌을 향유한다. 도자기의 제작과정과는 반대로 조형적인 기물로부터 ‘자연’이라는 원초성을 역으로 환원해내는 감상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뜻이다. 작가의 의도가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도예가나 감상자들은 도예와 자연을 오버랩하는데 주저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명지혜의 작업도 역시 이와 같은 선상에서 다가온다. 완결된 도자기의 기능과 형태와 그림으로부터 자연을, 그리고 맑은 자아에의 희구를 느끼게 된다.
명지혜의 작업은 성형에의 정밀한 탐닉과 표면의 자유스러운 그림 이미지를 통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주제의식을 견인하는 방식이다. 절대 조형으로서의 형태감과 회화적이자 문학적인 소재인 숲과 나무그림을 결합하여 자신의 장인적인 기량과 주관적인 표현의지를 드러낸다. <향기로운 숲>이라는 부제는 숲이라는 물질적 공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자신의 내면이 지향하는 알레고리로서 피안의 세계다. 마음의 안식처이자 정신적인 휴식처이고, 또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는 공간, 정화의 공간, 깨달음의 공간이다. 즉 일상생활로부터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견인해내려는 윤리적 의미에서의 자아에 대한 반영이자, 자연 쨧 숲 쨧 자아로 연결되는 이데아를 실현시키는 관념적 매개체이다.
그 공간에 이르는 과정은 복잡한 수사나 비유를 소거한 채 소박한 드러냄을 보여준다. 그래서 기물의 형상과 표면과 그림은 단조롭다. 가능하면 작위성을 배제하려 하면서도 지나치게 태토의 물성이 튀는 것도, 유약과 드로잉의 강조도, 경계하는 적당한 마무리가 중성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유도한다. 또한 프리핸드로 긁으면서 드로잉한 식물의 문양과 선은 그 자연발생적인 느낌으로 기물의 형태나 숲 이미지와도 잘 조화가 된다. 전체적으로 작가의 감정이 드러난 듯 하면서도 절제가 되어 보이고, 손맛 또한 정교한 듯 하면서도 일부분 적당한 미완의 여운도 남긴다. 그의 주제인 자아를 중용의 공간(숲)에서 되돌아보는 것에 대해 적당한 형식적 대응인 셈이다.
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그의 사유와 입장이 장점처럼 느껴지면서도 한편 아쉽기도 한데, 그것은 이번의 세 번째 전시에선 획기적인 형식적 전환이나 실험, 도예문화 전반에 대한 수평적 인식이나 반성이 자기세계의 구축보다 더 두드러져 보였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도공(Artisan)보다는 작가(Artist)의 입장에 둔다면 말이다. 그것이 자연인보다는 ‘예술가’로서 ‘나’를 깨닫는 중요한 행위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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