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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예술가 ‘정화석’
  • 편집부
  • 등록 2006-09-08 15: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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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예술가 ‘정화석’

흙으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면, 먼저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불바다를 건너야 하리라  - 2006년 6월 작가노트 중

서툰 몸짓을 거부하고 용납하지 않는 본성을 지닌 백자토
가소성이 적고 입자가 고운 백자토로 대형 조형물을 만들기는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작가 정화석(50)의 작업은 전통 혹은 전승백자가 아닌 백자토를 이용한 대형도조작품이다. 그가 백자토를 쓰는 이유는 흙 작업을 하면서 가장 먼저 흙의 본성을 살피고 오직 순수한 흙과 불의 만남으로 완성되는 흙의 물질성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백자토다. 백자토는 자신을 향한 서툰 몸짓을 거부하고 용납하지 않는다. 작은 균열에도 쉽게 갈라지는 민감함과 어느 색과도 섞이고 싶지 않은 순백색은 작가에게 큰 긴장감을 준다.
정화석은 백자의 물성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한번은 너무나 억울해 백자토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 어렵게 완성한 1미터가 넘는 백자토 두상을 가마에 넣고 온도를 무작정 올려보았죠. 두상이 완전히 무너져 눌려 나오는 것을 보고 통쾌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본성을 건드리면 가차 없이 반응하는 그 모습에 두렵기도 했습니다.”라고 한다. 예민한 백자토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1300℃의 고온을 견디고 드러내는 자연발색의 백자에서 느끼는 것은 다른 물질을 통해 만나는 백색의 느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작가는 그것에서 백색의 절정과 삶의 리얼리티, 무위無爲와 인위人爲의 조화를 찾고 있다.
화가활동 접고 생활방편으로 만난 흙과의 인연
과거 화가로 활동해온 정화석은 그동안 조각가와 도예가로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의 꿈을 꿔온 그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1970년대 중반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 치악산 아래에 작업공간을 마련, 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부터 회화작품으로 여덟 차례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82년 중앙미술대전과 1986년 동아미술제 등의 공모전에 출품, 입상하며 작가로 등단했다. 그러나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작품 활동의 지속은 생활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1986년경 그가 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닌 방편이었다. 순수미술을 포기한 체 경제생활에 집중하며 새로운 일을 모색하던 중 전통도예 작업을 하는 한 후배의 권유로 이천의 한 요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급여 8만원을 받고 요장의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며 지내던 조각사와 화공들의 작업을 곁눈으로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미술적 감각과 손재주를 지닌 그에게 그 과정은 새로운 예술욕구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흙 작업을 익힌 지 2년 만에 여주의 다른 요장으로 옮기게 됐다. 그곳에서는 그동안 익힌 그림솜씨를 인정받아 도자기 표면에 송학과 잉어 그리는 일을 반복했다. 가끔 자신의 생각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시도했지만 주인은 탐탁해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습작 그림을 눈여겨 본 한 분청도예가가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선금까지 내놓으며 당시 일반 직장인의 급여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했다. 조각사와 화공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얼굴」 연작은 한 시대의 목격이고 반영
여러 요장을 거치며 쌓은 다양한 경험과 자신감으로 1992년 경기도 여주 대신면 천남리 국도 도로변에 ‘청강도요’를 설립했다. 요장 운영초기 자신만의 작업공간을 갖게 됐다는 기쁨에 과거 회화작가로 활동할 당시의 실력을 되살려 도조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흙 작업의 다양한 과정에서 겪는 여러 한계에 부딪혔다. 태토와 유약제조, 번조기술의 어려움이었다. 홀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번의 실패와 노력을 감수하며 흙 작업에 몰입했다. 과거 부득이하게 중단해야만 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흙 작업에 대한 희열은 더 커졌고 남다른 노력의 결과로 결국 순수미술과 전통도예기법이 접목된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흙의 물질성과 불의 번조를 기반으로 빚어지는 대형도자조각”이라고 한다. 흙 작업을 본격시작하면서 선보인 것이 「얼굴」 시리즈다. 장석과 규석, 옹기토를 섞어 타래기법으로 성형하고 오랜 시간 두들기고 깎아 빚은 매우 거친 질감의 대형도조작품이다. 두상에는 낫과 호미, 칼, 톱을 들이대 거친 질감으로 표현된 극단적인 주름이 있다. 유약을 사용하지 않고 고온으로 번조한 까닭에 인물 두상의 깊은 주름은 더욱 원시적이고 자연스럽다. 작가는 “얼굴은 한시대의 목격이고 반영”이라고 한다. 그의 「얼굴」 연작은 인고와 끈기로 삶을 일궈온 우리 민족성을 나타내고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순수미술대상 공모전에 참가해 1999년 경인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2000년 동아미술제 특선, 200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등을 수상했다. 브론즈나 돌조각 작품과는 다른 느낌의 도조작품으로 당시 미술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진 1, 2)
흙 작업으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난 2000년부터는 ‘세계도자기엑스포’의 국제워크숍 작가로 초청돼 각국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재료에 대한 해석, 표현의 다양성, 주제 접근법 등을 경험했다. 이후 2003년 <평택국제아트페스티발>과 2004년 태국 방콕의 실파콘대학에서 열린 <한국·태국 미술교류전>에도 참가했다. 그는 여러 워크숍에서 다양한 실험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당시 “자연환경으로의 환원을 의식한 흙의 순수함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철이나 브론즈, 돌 등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신기한 매스감을 느끼게하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사진 3)

흙 작업 첫 개인전 <흙으로 빚은 미소>
올해 6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가진 <흙으로 빚은 미소>라는 주제의 전시는 작가로서는 16년만에, 흙 작업으로는 처음 갖는 개인전이었다. 전시장은 인물형상을 담은 「소녀」 「얼굴」 「자소상」 등의 도조연작과 볼펜화 평면작품과 함께 설치한 「대지」 시리즈로 구성됐다. 도조작품 모두는 1m가 넘는 백자토 조형물이었다. 작품들은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고 백토자체의 색감만을 지니고 있었다. 기물은 1260℃~1320℃의 높은 온도로 환원번조 됐다. 온도차에 따라 백색의 순도와 색감이 달랐다. 전시기간동안 작품을 관람한 이들 중 특히 도예가와 전공학생들의 관심과 질문이 많았다. 백자토로 1m가 넘는 크기의 대형작품을 만든 것에 대한 것과 거친 질감 표현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작가의 대답은 한 결 같았다. “흙을 만지고 있는 시간에 달렸다.” (사진 4, 5, 6)
작가는 재료의 성격은 시간과 노력으로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는 “작가라면 무엇이든 시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재료를 이용하든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든 언제나 ‘가능성’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라고 말한다. 정화석은 장르의 벽이 없는 현 세대의 예술세계에 생각과 방법을 열고 맘껏 유영하고 있는 ‘흙 예술가’이다.
김태완 기자 anthos@paran.com


1 「두상 - 대지의 분노」 혼합토(200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구상계열 특선작)
2 「2003 두상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백자토 혼합토, 2003년작
3 「From the Silence of Land」 국제예술문화교류전 참가작품
4 「얼굴Ⅰ」 백자토, 1320℃ 환원번조, 자연발색
5 「대지」 평면(볼펜화) 및 도자설치
6 「연인시리즈」 백자토, 1320℃ 환원번조, 자연발색

< 본 사이트에는 일부자료가 생략되어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도예를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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